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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17 음란한 기획회의 (5)
  2. 2007.09.15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기획회의

감독 남자, 작가 남자, 대표 남자, 팀장 남자. 이렇게 남자 넷이 모여 여자들의 솔직담백한 이야기가 소재인 케이블 드라마의 기획 회의를 했다. 아무래도 남자들 넷이 모여 기획 회의를 하려니 처음엔 좀 서먹서먹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음담패설이 하나 둘 씩 튀어나오더니 회의 분위기는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음담패설은 대표가 시작했다. 나와 작가는 서먹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다수의 등장인물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소개할 수 있을까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 있었다. 작가는 다수의 등장인물 한명 한명을 뭔가 색다른 방법으로 소개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냥 자막으로 설명하라고 했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 잠깐 화면을 정지시키고 화면 하단에 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성격 등을 자막으로 넣어주면 되는 것이다. 쉽게 갑시다. 작가는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더니 자기는 자막이나 나레이션의 남발보다는 뭔가 색다른 방법으로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싶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한참을 이런 얘기로 실강이를 벌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대표님이 감독님보고 여자들한테 인기 많게 생기셨는데 실제로도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감독님은 대표님의 뜬금없는 질문을 받고 잠깐 한숨을 쉬더니 자기는 토끼라서 여자들이 싫어한다며 자기보단 대표님이 코가 커서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을 것 같다고 대꾸해주었다. 대표님은 자기는 토끼의 반대 증상 때문에 여자들이 지겹다고 싫어한다며 껄걸 웃으셨고 감독님은 토끼의 반대 증상이면 여자들이 싫어할 리가 없다며 은은한 미소를 지으셨다. 갑자기 작가가 큰소리로 웃기 시작해서 나도 따라 웃어주었다. 잠시 후 작가는 자기도 사실은 OO라고 고백했고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사실은 나도 조금은 OO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물론 나는 OO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분위기만 맞춰준 것 뿐이다.


감독님의 허심탄회한 고백을 시작으로 서먹서먹했던 분위기는 빠른 속도로 부드러워졌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옛날에 여자들과 재미있게 놀았던 에피소드들을 하나 둘 씩 두서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감독님은 몇몇 에피소드들은 드라마에 반영해도 될 것 같다며 작가에게 받아적으라고 시키셨다. 남자 넷이 모여 웃고 떠들 때는 재미있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좀 지나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별로 재미가 없다. 드라마에 반영될 것 같진 않다. 대표님은 작가에게 케이블엔 심의가 없으니 일단은 솔직하게 하고 싶은 대로 쓰라고 지시하셨다. 하고 싶은?;;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드라마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세부 디테일들에 대해 음란한 합의가 이루어졌고 일단은 작가 혼자서 회의에서 합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좀더 디테일한 시놉시스를 공짜로 써 오기로 했다. 감독님이 먼저 작가가 아직은 검증받지 않은 신인이기 때문에 시놉시스까지만 일단 한번 써와보고 그 결과물을 보고 다시 얘기하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얼씨구나 그러시라고 했다. 작가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감독님도 뭔가 생각이 있을 테니 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집에 오는 전철 안에서 만약 이번 프로젝트가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케이블에서 방송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을 해보려 했는데 수년간 흐지부지 엎어지는 프로젝트에만 참여해왔던 후유증 때문인지 도저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내가 감히 뭔가를 만들어보려고 시도해도 되는 건지 누구한테 허락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다.

Posted by 애드맨

나는 우리 대표가 재밌을 것 같다고 건네는 원작 아이템이 도무지 재미가 없다. 그건 나의 직속 상사인 황언니도 마찬가지여서 대표님이 영화계에 대해 잘 모르니 우리가 도와야 된다고 이미 몇달전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런데 나는 우리 기획팀의 대장 황언니가 재밌다고 들이미는 원작 아이템도 도무지 재미가 없다. 그건 우리 기획팀의 대장 바로 밑의 송언니도 마찬가지여서 기획 회의를 할 때마다 이게 더 재밌네 저게 더 재밌네 하며 한바탕 설전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 기획팀은 황언니, 송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세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다른 팀원들이 내가 들이미는 아이템을 재밌다고 하지도 않고 나도 송언니나 황언니가 들이미는 아이템이 시시껄렁하다.


기획 회의 자리가 자존심 싸움도 아닌데 어느 날인가부터 각자의 영화인생을 건 자존심 싸움이 되 버려서 서로가 서로의 아이템을 깍아내리고 자기의 아이템이 최고라고 울부짖는 자리가 됐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누군가 영화화에 가장 적절한 대박 아이템을 추천하면 모두가 감동한 다음 그 감동의 힘으로 으쌰으쌰 영화화를 위해 밀어붙이는 경운데 그러기가 사실 쉽지 않고 누구의 아이템이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인지 절대 답이 나오지 않을 토론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감정 싸움이 되버리곤 한다. 이런 과정을 몇 달 거쳐서인지 황언니와 송언니는 은근히 사이가 좋지 않게 되버렸다. 만약 내가 없다면 두 사람은 같이 밥도 안 먹을 분위기다.


오늘 열린 기획회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건진 대박 아이템이 없다는 것을 서로 확인한 후 그동안 진행 중인 작품 점검을 하다가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황언니가 재밌을 것 같다고 구매한 시나리오를 송언니가 다른 영화사에 팔아버리라고 강력하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송언니의 회사 자금 사정도 안좋은데 그 시나리오 다른 영화사에 팔아버리면 안되겠냐는 발언을 들은 황언니는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총천연색으로 변하더니 니가 영화에 대해 뭘 아냐부터 시작해서 서로의 영화 인생을 건 한바탕 설전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사실 그 작품으로 말할 거 같으면 공모전에서 수상은 했다만 연출하고 싶어하는 감독도 없고 출연하고 싶어하는 배우도 없다. 이미 여러명에게 돌렸고 모두에게 까인 폐기처분 직전의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전부터 모 영화사에서 준비하는 우리 시나리오와 비슷한 컨셉의 시나리오가 캐스팅이 끝났고 크랭크인 날짜까지 잡았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은 황언니는 괜찮다 별 일 있겠냐라고는 했지만 솔직한 생각으로는 그 작품은 송언니 주장대로 다른 회사에 팔든가 엎는 게 맞다.


나는 중간에서 딱히 할말도 없고 해서 아무 말 없이 설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상대로 평소에 불만이었던 일들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한 후 살갑게 화해하며 회의가 마무리 되었다. 물론 진심으로 화해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고 두어시간 회의는 했다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이템 기획 회의를 몇 달 해본 결과 이런 식으로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아이템 회의라는게 뜬구름 잡기랑 비슷해서 도저히 재미가 없을 것 같은 아이템도 이창동이나 박찬욱이 하겠다고 들이밀면 바로 메이드 되는 것이고 제법 괜찮을 것 같은 아이템도 나나 송언니 그리고 황언니가 들이밀면 씨알도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밀양이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같은 시나리오를 신인작가가 만들어보겠다고 투자사에 들이밀었다면 귀싸대기 서너대 맞고 영화사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영화판이 원래 이런 곳이다.


결국 어떤 얘기를 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누가 얘기하는지가 중요한데 우리 기획팀 세명 모두 시장의 신뢰를 얻을만한  검증받은 데이타가 없다. 이래서는 백날 가도 영화 만들기 힘들다. 내가 영화사 사장이라면 기획팀 따윈 거느리지 않을 것이다. 영화 제작이 목표라면 기획팀 일년 운영할 비용으로 A급 감독 한명과 묻지마 계약을 하고 룸싸롱 같은데 열심히 데리고 다니는게 낫다.


그래서 나는 기획회의가 끝나고 예전에 스텝으로 참여했던 망한 영화의 착한 스텝들과 만나 술 한잔 하고 집으로 왔다. 내일은 토요일이다. 만세.

Posted by 애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