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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27 나는 김영진의 러프컷 애독자이다
  2. 2007.09.11 김영진 기자 vs. 김영진 교수

영화계 재기에 대한 생각

나는 <김영진의 러프컷> 애독자이다. 꽤 오래 전부터 <김영진의 러프컷>이 업데이트될 때마다 꾸준히 정독하고 있다. 최근에 업데이트된 <영화계 재기에 대한 생각>도 흥미롭게 읽었다. 안타깝게도 한국 영화계는 그가 러프컷에서 꾸준히 피력해온 희망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그럴수록 애정이 샘솟는 모양이다. 안타까움이 지속되면 내적으로 지칠 텐데, 김영진은 그걸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승화시켜 끊임없이 가슴 뜨끔한 충고들을 쏟아내고 있다.


김영진은 이번 <김영진의 러프컷>에서 우석훈의 책들에 대한 감상과 인용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했다. 자신이 우석훈의 책들의 애독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한국 영화계에도 우석훈과 같은 혜안이 있는 이론가가 있었다면 훨씬 입체적인 대안을 많이 내놓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우석훈에 대한 평가는 둘째치고라도 김영진이 그토록 안타까워하는 한국 영화계의 현실은 우석훈과 같은 이론가의 부재 때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솔직히 김영진이 우석훈보다 못할 게 뭐 있는가?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 분야에선 김영진이 우석훈보다 뛰어날 것이다. 한국 영화계의 문제는 우석훈과 같은 이론가가 있고 없고의 여부가 아니다. 김영진 스스로도 주장했듯 문제는 복잡하지 않기 때문이다. 답은 뻔히 나와 있고 대안도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이다. 역사적으로도 대부분의 문제들은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였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한국 영화 침체의 원인 분석과 꾸지람(?) 그리고 한심하다는 듯 터져나오는 훈수와 대안들에 관한 언론 기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조선 시대에 활약했던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이 생각난다. 그들도 보다 이상적인 토지 활용법에 대해 고민하며 여전제, 균전제, 정전제 등의 주장을 했지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침묵했다. 보다 이상적인 토지 활용법에 대해 자기들끼리 갑론을박 할 수는 있지만 당시 대다수 토지의 주인이었을 양반들이 그들의 주장에 동의해 자신들이 소유한 토지를 내 놓는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도 문제는 복잡하지 않다. 다만 힘없는 실학자들이 힘있는 양반들 소유의 토지를 ‘어떻게’하려면 아마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게 문제였을 것이다. 목숨을 걸지 않는 이상 그 ‘어떻게’는 ‘어떻게’가 아닌 것이다. 당연히 실학자들의 주장은 수포로 돌아갔고 그들이 주장했던 여전제, 균전제, 정전제 등은 이제 교과서로만 전해 내려올 뿐이다.


김영진은 부가판권시장이 궤멸했고 극장흥행은 양분되었고 등등 여러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정착시키면 된다고, 스크린 숫자를 제한하면 된다고, 부가판권 시장 문제라면 불법 다운로드를 합법화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면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부가판권 시장 문제에 관해서는 정부가 마음먹고 밀어붙이면 안 될 것이 없지만 그게 되지 않는 이유도 언급하며 안타까워한다.


백번 옳은 소리지만 김영진의 문제도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이다. 특히 스크린 숫자를 제한하면 된다는 주장이 그렇다. 김영진은 ‘단순하게 말하면 스크린 숫자를 제한하면 된다’ 고했지만 절대로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토지에 대해서라면 토지의 소유와 처분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적절히 제한할 수 있다는 토지 공개념이라도 적용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스크린에 대해서는 스크린 공개념(?)을 주장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헌법 제123조는 '국가는 토지소유권에 대해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민법 제2조는 '개인의 소유권리라도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동법 제212조에서는 '개인의 소유권이라도 정당한 이익이 있는 범위 내에서만 행사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스크린은 토지와는 다르다. 스크린의 주인은 스크린을 소유한 기업의 주주들이기 때문이다.

CJ CGV나 롯데쇼핑(롯데시네마는 롯데쇼핑의 시네마사업본부이다.) 주주들에게 문화 산업 다양화를 위해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지구가 멈추는 날> 개봉관 수를 좀 줄이고 대신 장률 감독의 <이리> 개봉관 수를 늘려달라고 요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를 굳이 겪어봐야 아는 건 아니다. 이에 대해 문화 산업에는 국가의 정체성과 유산이 걸려 있고 국가는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고유한 권한과 책임을 가지므로 국가는 그들의 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는 문화 산업 보호의 명분이 있긴 하지만 스크린쿼터조차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단순하게 스크린 숫자를 제한하면 된다고 주장해봤자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우여곡절 끝에 스크린 숫자 제한에 성공한다 해도 문제는 남아있다. 자꾸 <이리>를 예로 들어서 미안한데 만약 <지구가 멈추는 날> 개봉관수를 줄이고 <이리> 개봉관 수를 확대하는 식으로 스크린 숫자 제한을 확대 실시한다면 전체 극장 관객수 자체가 줄어들 가능성이 없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스크린 숫자 제한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 지의 여부는 둘째치고라도 스크린 숫자를 제한한다 해도 <이리>같은 작은 규모의 창의적인(과연 <이리>가 창의적인 영화인지의 여부도 둘째치고) 영화의 개봉관수가 늘어난다는 보장도 없고(스크린 숫자 제한으로 인한 빈 개봉관들은 <이리>같은 영화들이 아니라 제2, 제3의 <지구가 멈추는 날>같은 영화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스크린 숫자 제한으로 인해 한국영화 시장의 파이 자체가 작아질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절대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김영진 뿐만 아니라 강한섭과 우석훈을 포함한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의 문제도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이다. 상황이 불변한다면 과거 설명에 유효한 이론은 미래 예측에도 유효하다. 그러나 현실이란 상황의 변화를 주된 성격으로 한다. 미래의 상황이 현재와 다르지 않다면 과거에 대한 설명력이 예측력으로 직통될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는 변화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경제학자들이 과거에 대해 아무리 그럴듯한 설명력을 가졌다 해도 그와 동급의 예측력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 B라는 문제가 있는데 과거에 A였기 때문에 B라는 문제가 발생했다고 주장하며 A를 비판할 수는 있으나 A가 아니었다고해서 B라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지에 대해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므로 A를 비판하는데 대부분의 분량이 할애되어 있는 경제학자들의 책은 연예인 가쉽 기사 읽듯이 한번 읽고 잊어버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경제학자들은 과거를 설명하고 비판하는 데에는 뛰어날 수 있지만 정확한 미래 예측력을 바탕으로한 ‘어떻게’를 포함한 현실 문제 타개를 위한 유효한 정책 수립은 그들의 전공이 아닌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궁극적인 ‘무엇을’에 대해선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귀납적 분석을 곁들이며 남들보다 그럴듯하게(말 그대로 그럴듯하게) 주장할 수 있지만 미래는 과거와 다르고 현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하고 있으므로  ‘어떻게’해야 그 ‘무엇을’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선무당이 될 수 밖에 없다.


강한섭은 얼마 전에 한국 영화 침체의 대안으로 800억 펀드를 제안했는데 ‘어떻게’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다. 800억 펀드가 조성되면 참 좋을 것 같다. 왜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어떻게 800억 펀드가 가능한지보다는 왜 900억이나 1000억이 아니라 800억 펀드였는지가 궁금하다. ‘어떻게’가 없는 대안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제안할 수 있다. 나는 한국 영화 침체의 대안으로 800억 펀드가 아니라 5000억 펀드를 제안하고 싶다. 강한섭의 800억 펀드보다 애드맨의 5000억 펀드 제안이 더 뛰어난 제안이 아닌 것과 같은 이유로 미래 예측과 정책 제안 분야에서는 ‘무엇을’보다는 ‘어떻게’가 중요한 것이다.


김영진은 우석훈의 <짝패>에 대한 상찬을 전해들은 류승완이 ‘그 분 훌륭한 분이더군요. 근데 주류는 아니죠?’라고 웃으며 반문했다는 이야기를 언급하며 주류 비주류론을 제기했는데 주류라서 어떻고 비주류라서 어떻고 백날 따져봤자 사태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인신공격의 오류’ 또는 ‘정황에 호소하는 오류’에 빠질 뿐이다. 주장의 정당성은 주장하는 이의 사람됨이나 정황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김영진은 자칭 타칭 경제전문가들이 수두룩한 학계와 언론계에서 경제위기에 대해 누구도 명쾌하게 진단하는 걸 보지 못했다며,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정말 실력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정확히 실력이 없다기보다는 아마도 ‘어떻게’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해야 하는가. 안타깝지만 나에게도 ‘어떻게’는 없다. 그러나 지금 문득 생각난 ‘어떻게’가 하나 있긴 하다. 다른 문제들에 대해선 잘 모르겠고 작은 규모의 창의적인 영화 활성화의 대안으로 전국의 대학교에서 영화학과 학생들과 교양 영화 수업을 듣는 대학생들에게 작은 규모의 창의적인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작은 규모의 창의적인 영화를 반드시 극장에서 관람하고 티켓을 첨부한 감상문 리포트를 제출하기 과제를 내 주는 건 어떨까? 학생들이 싫어할까? 이거 혹시 불법인가?;;;


과연 내년에는 몇 편의 한국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Posted by 애드맨

필름2.0 김영진 기자를 좋아한다. 김영진 기자가 연재하는 러프컷은 한 회도 빼놓지 않고 읽어오고 있다. 이번호 러프컷 영화광의 꿈과 생활인의 응시도 역시 좋은 글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김영진 기자가 교수라는 사실이다.

물론 교수도 생활인이고 나름대로의 고충과 어려움이 있는 직업이겠지만 전업 영화 잡지 기자보다는 훨씬 편하고 배부르게 느껴진다. 여전히 김영진 기자의 글은 훌륭하고 감동적이지만 김영진 기자가 아니고 김영진 교수가 쓴 글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글을 읽어보면 배부르고 등따시니까 이런 글이 나오겠구나 싶다. 그렇다고 진정성이 떨어진다거나 글의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느낌은 아니다. 다만 강건너 불구경한다는 느낌?

지난 주 러프컷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본 두편의 영화 생각에서 김영진 기자는 '구로사와 기요시와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를 보면서 한국영화의 체력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젊은 감독들의 허영기 없는 맷집이 긴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외형적으로 풍요로운 듯 보이지만 영화적 정체에 대한 사고가 전무하다는 점에서 한국영화계도 이미 폐허 같은 지점에 와 있다.'라고 했는데 이는 영화학과 학생들에게 영화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는 충분히 쓸 수 있는 글이지만 영화산업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영화 잡지 기자가 쓸 필요는 없는 글이었다.

만약 박봉에 시달리는 전업 영화 잡지 기자가 저런 글을 쓴다면 상당히 멋있어 보일 것 같다는 아쉬움에 두서없이 끄적여 보았다.
Posted by 애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