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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회사를 관두지도 않았는데 메신저에 들어갈 때마다 오프라인 표시로 들어가게 된다.

메신저에 접속할 때마다 대화상대로 등록되어 있는 작가들에게 작품 진행 과정에 대한 문의가 오는데 딱히 할 말도 없고 잘 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 잘 되고 있다고 사기를 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속 편하게 오프라인으로 표시로 은밀하게 접속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심정은 아마 이럴 것이다. 한 두번 겪은 것도 아니고 안봐도 훤하다.


처음 계약을 할 땐 좋다. 설레인다. 드디어 꿈을 이룬 듯한 성취감이 들 것이다. 그날 이후 (보통 각색 계약까지 한다) 작품 진행 회의도 하고 술자리도 자주 갖는다. (이런 술자리에서 연분이 생기기도 한다는데 나는 안 겪어봐서 모르겠다.) 자신의 작품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 날이 머지 않은 것 같아 두근거린다. 영화사 사람들과 친해진 기분이고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세상이 아름다워보인다. 회의 때마다 A4에 인쇄되서 나온 과학적으로 보이는 시나리오 모니터 결과 같은 걸 보면 왠지 뿌듯하기도 하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가고 회의를 거듭해도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냥 한 소리 또 하고 뜬구름 잡는 기분만 든다. 이제 설레임은 없다.


일주일에 두세번 가던 영화사를 한번만 가게 되고 다음 미팅은 일주일 뒤로 한달 뒤로 혹은 준비되면 연락할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다. 술자리도 없다. 반쯤 체념한 기분으로 알아서 잘 만들어주겠거니 생각하며 속편하게 집에 간다. 방에 들어와 예전에 써두었던 이런 저런 아이템들을 뒤적이고 게임도 하고 친구들 만나서 술도 마시다보면 한달은 금방이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 회사에서 전화가 온다. 반가운 마음에 영화사에 가면 뭔가 미묘한 변화가 느껴진다. 일단 회의 참석 인원이 예전보다 적고 회의 진행 준비 상태가 미흡해 보이며 심지어는 지들끼리 진행해보고 연락준다더니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던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정답이다.


예전엔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였는데 이제는 믹스커피를 마시며 맞은 편에 앉은 영화사 직원과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눈다. 정말 잡다한 얘기를 하다가 할 얘기가 다 떨어지고 나면 작품 얘기를 시작하는데 얘기를 들어보면 별 진행사항은 없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막연히 윗분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상황을 설명해준다. 작가로서는 더 이상 할 일도 없고 들을 얘기도 없다. 계약서에 명시된 돈이나 다 받았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처음의 설레임은 다 어디로 가고 권태기의 연인처럼 김빠진 분위기에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다. 다 그런거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영화사 문을 나서면 어느 작가는 쓰자마자 스크린까지 직행이라는데 나는 왜 이러나 싶어 한숨이 나오지만 누구랑 술마시고 싶은 기분도 안 나고 해서 곧장 집으로 간다. 괜히 차를 끌고 온 경우엔 제법 나온 주차비에 피눈물이 난다. 집에 도착해 통장 잔고를 체크해보면 얼마 되지도 않던 계약금은 어디로 가 버린걸까? 잔고를 확인한 순간 고향에 온 듯한 궁핍한 절망감이 온 몸을 휘감아온다. 다시 원점이다.


경력도 안되고 돈도 못 벌고.

경력도 안되고 돈도 못 벌고.

경력도 안되고 돈도 못 벌고.


메신저에 들어가서 분풀이라도 할 수 있을까 싶어 예전에 대화상대로 등록해둔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을 찾아본다. 회사에서 못다한 얘기도 하고 싶고 진행사항에 대해 궁금한 것도 많은데 하필이면 오프라인으로 표시되어 있다. 분명히 내가 차단하거나 삭제하진 않았는데 점점 메신저에서 만나기가 힘들어진다. 예전에 심심할 때 메신저에서 만나면 이런 저런 시시콜콜한 잡담도 많이 나눴는데 요즘엔 만난 적이 없는 것 같다.


혹시 나를 차단한걸까? 아니면 오프라인으로 표시하고 몰래 접속하는 걸까?


답은 후자다.

나는 오프라인 표시로 몰래 접속한다;;

Posted by 애드맨

추석이 끝나서인지 회사에는 하루종일 대표 찾는 전화가 부쩍 많이 왔다. 추석이 끝나자마자 본격적으로 전화가 많이 온 이유는 대표가 그 동안 돈 달라고 보채는 거래처 사람들에게 추석 후에 어떻게든 해결해드리겠다고 얘기해왔기 때문이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추석 연휴 다음날이 됐지만 대표는 여전히 돈이 없는지 자기를 찾는 전화가 오면 없다고 말하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래서 하루종일 회사내 각 부서 책상마다 전화벨이 수없이 울려댔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대표님 안계십니다 뿐이다.


오늘은 드디어 전화로만 밀린 돈을 독촉 해대던 사람들 중 한명이 사무실로 직접 찾아왔다. 나는 약속이 있어 회사 사람들과는 따로 점심을 먹고 좀 일찍 들어와 밀린 시나리오들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사장님 계신가? 라는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어보니 왠 뚱뚱한 아저씨 한 명이 사무실 출입문을 살짝 열고 들어와 있는 것이 보였다. 보통 영화사에서는 사장보다는 대표라는 호칭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누가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빌딩 관리인 아저씨보다는 높은 월세담당 아저씨였다. 마침 점심 시간 직후라 사무실에는 나와 대표 밖에 없어서 내가 직접 외부 손님을 상대해야 됐는데 대표는 대표 방에 있었지만 대표는 없다고 적당히 둘러대야만 했다.


이 아저씨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건물 관리하는 아저씨라 사무실 앞에서 하루종일 지키고 서 있으면 언젠가는 대표와 뻔히 만나게 될텐데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몰라 망설이던중 고맙게도 대표가 대표방에서 알아서 나와주었다. 대표가 월세 담당 아저씨를 만나러 나왔는 줄 알고 왠일인가 싶었는데 대표는 아저씨에게 살짝 목례만 하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대표는 굳은 얼굴로 월세 담당 아저씨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밀린 시나리오를 검토했지만 어째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연휴 동안 못했던 밀린 채팅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 메신저에는 토탈 70명 가량의 친구가 등록되어 있는데 그 중 영화인 친구 수는 20명 정도 된다. 한참 잘 나갈 때(?)는 메신저에 로그인한 영화인 친구 수십명에게 차례로 인사 나누고 안부만 전해도 반나절이 갔는데 몇 달전부터 영화인 친구들이 하나 둘씩 메신저에서 사라져 버려 지금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내가 차단당하고 있는 건가 싶어 걱정도 했었는데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회사가 망했거나 회사를 관뒀거나 아님 짤렸기 때문에 로그인할 일이 없을 뿐이라고 하는데 메신저에 접속한 영화인 친구 수도 영화계 불황과 호황을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전같으면 추석때 대박친 영화 얘기도 하고 누가 무슨 영화 하는데 언제 크랭크인 한다더라 누가 캐스팅됐다더라 누가 어느 파트에서 사람 구하는데 혹시 아는 사람 없느냐는 식의 업계 얘기가 활발히 오고갔을 텐데 오늘의 영화인 친구와의 대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대화는 친구가 다니는 영화사가 현재 입주해있는 빌딩의 사무실 월세를 감당못해서 이사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우리 대표와 빌딩 월세 담당 아저씨의 심각한 얼굴을 보아하니 남의 회사 얘기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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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애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