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식업무일지'에 해당되는 글 33건

  1. 2014.02.13 정신과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2. 2014.02.10 남의 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능력
  3. 2013.12.22 진짜 맛없는 스테이크 (1)
  4. 2013.12.14 책을 팔았다
  5. 2013.12.11 책을 나눠주고 있다
  6. 2013.11.30 돈 좀 있다는 사람들에게 굽신거리지 마라
  7. 2013.11.25 술 못 마셔요
  8. 2013.06.05 연기지도 이렇겐 하지 마라
  9. 2013.04.01 각본, 감독 계약완료
  10. 2013.01.31 나는 어떻게 천만 감독이 되는가_1
  11. 2013.01.14 나는 어떻게 억대 드라마 작가가 되는가_3
  12. 2012.12.04 나는 어떻게 억대 드라마 작가가 되는가_2
  13. 2012.11.15 나는 어떻게 억대 드라마 작가가 되는가
  14. 2008.03.11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3년 후
  15. 2008.03.09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우정
  16. 2008.03.08 기분 좋게 술 한 잔 살 수 없는 나날들
  17. 2008.03.06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우라까이
  18. 2008.03.06 시나리오 문제점 적발에 최선을 다하고 자빠졌고
  19. 2008.03.03 이젠 정말 몇 명 남지 않았다
  20. 2008.03.01 망해가는 영화사만 골라서 다니는 재주 (1)
  21. 2008.02.26 가장 차기작이 기대되는 감독님
  22. 2008.02.23 캐스팅 준비
  23. 2008.02.21 누구 말이 맞냐
  24. 2008.02.21 제목 회의
  25. 2008.02.19 타인의 노력을 비웃지 말자
  26. 2008.02.15 불신의 시작
  27. 2008.02.11 흥행내기에서 졌지만 돈은 바로 못준다
  28. 2008.02.03 6년째 각색중 (2)
  29. 2008.02.01 영화판을 떠나는 친구들
  30. 2008.01.30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원작 추천 회의 (4)

혼자서 오랜 시간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몸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어질 때가 많다. 잘 나가는 작가들도 그렇다고 하는데 못 나가는 작가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망생들은 오죽하겠는가. 보통은 내가 시나리오만 잘 쓰면 다 해결되겠거니 생각하고 열심히 시나리오를 잘 쓸 각오만 다지는데 그게 꼭 그렇지가 않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시나리오 작가의 처우는 열악하기 그지없다. 특히나 신인이나 지망생은 제대로 된 제작자를 만나지 않는 이상 더욱 그렇다. 계약서에 도장 찍고 원고료 일부 입금된 거 확인하고 나면 마구 들떠서 드디어 해냈구나 싶지만 잠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돈은 얼마 되지도 않고 딱히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한 마디로 별 거 없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열심히 해서 훌륭한 작가가 되면 된다. 문제는 시나리오 작업이라는 게 회의를 한다고는 해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머리 어딘가에 나사가 풀리거나 살짝 이상해져도 본인은 자각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차라리 오래 앉아 있어서 허리가 아프거나 술을 많이 마셔서 위나 간이 나빠지는 건 티가 나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주 가는 편의점이나 카페 알바생의 태도가 불량하게 느껴지고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거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비웃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온다고 한다. 만약 하루 종일 편의점 알바생의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고 시나리오를 쓰려고 할 때 마다 편의점 알바생 생각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고 편의점 알바생을 응징(?)하는 상상을 하며 흥분하거나 밤에 잠도 안 오고 중간에 자주 깨기까지 한다면 한번쯤 의심해 봐도 좋다. 여기서 더 나아가 주변 사람들과 티격태격 횟수가 급증했거나 안 보고 사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거나 시나리오 모니터를 받거나 해 주며 필요 이상으로 언성을 높인 적이 있거나 자꾸 카톡 확인 여부에 집착하게 된다면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물론 정신과 한 번 간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영화에 흔히 나오는 그런 의사를 기대해도 안 된다. 편안한 롱체어에 누워 오랜 시간 진솔한 대화를 나눈 후 영혼의 상처를 치유 받거나 하는 일도 기대하지 마라. 그러나 의사가 지어준 약이라도 꼬박꼬박 먹는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잠도 잘 오고. 정신과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Posted by 애드맨

해가 갈수록 남의 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능력이 줄어들고 있다. 한 때는 서너 시간도 거뜬히 들어줬는데 이젠 두 시간 정도가 한계다. 나도 늙었나보다. 오로지 맞장구만 치면서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며칠 전에 한 번 해 봤는데 처음엔 버틸 만 했지만 30분 정도 지나니까 틈만 나면 끼어들게 되고, 1시간 정도 지나니까 말을 중간에 끊으려 하고, 1시간 반쯤부터는 대놓고 스마트폰을 힐끔거리게 되고, 2시간 지나니까 급하게 어디 좀 가야 된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되더라. 그래도 만나서 듣는 건 차라리 낫다. 전화로 들어주기는 진짜 못할 짓이다. 예전엔 1시간 정도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이젠 20분도 힘들다. 5분 지나니까 귀가 아파오고, 10분 넘어가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15분쯤부터는 말을 쉬는 타이밍을 봐가면서 ‘전화로 이러지 말고 언제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뉘앙스의 말을 흘리며 끊기를 유도했지만 그래도 끊으려는 기미가 안 보이자 예전 같음 몰래 딴 짓을 해가면서 듣는 시늉만 했는데 이젠 대놓고 ‘언제 만나서 이야기 하자’는 뉘앙스의 말을 알아듣고 끊을 때까지 반복해버렸다. 그렇게 끊은 후 통화 시간을 확인하니 20분 살짝 지나있더라. 서운해 하는 기색은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건 에너지 소모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그런 날 밤엔 아주 푹 잘 수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나도 조심해야겠다.


Posted by 애드맨

어제 저녁 강남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아직까지 기분이 나쁘다. 맛이 진짜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는 그런 스테이크는 처음 먹어 봤다. 그걸 스테이크라고 불러도 되는 지 모르겠다. 그 가게는 어제가 두 번 째 방문이었는데 첫 방문 땐 괜찮았다. 나는 스파게티만 먹었기 때문이다. 맛집 블로그에서 알게 된 가게인데 가격대 성능비가 괜찮고 인테리어도 괜찮고 종업원들도 친절해서 마음에 들었었다. 어제도 스테이크를 먹기 전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주문 이후다. 음식이 거의 주문과 동시에 나오길래 빠르다고 좋아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빨리 먹고 나가라고 미리 구워둔 고기를 주문과 동시에 덥혀서 내놓은 게 아닌가 싶다. 주문과 동시에는 뻥이지만 확실히 스테이크 치고는 너무 빨리 나왔다. 고기 상태도 이상했다. 미디엄으로 구워오긴 한 것 같은데 어찌된 게 육즙이 거의 없이 퍽퍽하기만 했다. 고기에 뿌려 놓은 소스의 향과 맛이 괜히 강렬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고기를 처음 한 입 베어 문 순간 너무 맛이 없고 질겨서 이 모든 게 꿈이었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내가 원래 입맛이 까다롭지가 않아 어지간해선 음식을 남기는 주의가 아닌데도 차마 다 먹지 못하고 몇 조각 남겼으면 정말 맛이 없는 거다. 아직도 그 맛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사기당한 기분이다. 첫 방문 때 스테이크를 하나도 안 남기고 맛있게 먹어준 동생들에게 감사하고 또 미안하다. 맛이 없으면 없다고 얘길 하지;

Posted by 애드맨

말로만 듣던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서 책을 팔았다. 대만족했다. 총 26,000원어치 책을 5,400원에 팔았기 때문이다. 완전 야박하게 후려칠 줄 알았는데 선처(?)받은 기분이다. 알라딘 플래티넘 회원이라 적립금까지 쌓였다. 팔아버린 건 야구 책 두 권이다. 야구가 뭐가 재미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주변에서는 다들 재미있다고 난리고 경기결과를 두고 마치 자기 일처럼 일희일비하는 모습들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소외감을 느껴오던 차에 뭘 좀 알고 보면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해서 샀고 몇날 며칠을 수험 공부하듯 열심히 정독했는데도 뭐가 재미있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직관은 지루하기만 했고 심지어 돈을 걸고 봐도 재미가 없었다. 경기장에서 마신 맥주와 치킨 그리고 피자는 맛있었지만 그거 먹자고 경기장까지 갈 순 없는 노릇이다. 이젠 책까지 다 팔아 버렸으니 야구와 친해지기는 영영 힘들 것 같다. 포기했다. 야구 책 몇 권 더 있을 텐데 다 찾아내서 팔아버려야겠다. 딱 한 권 ‘야구란 무엇인가?’는 안 팔 예정이다. 훌륭한 책이기 때문이다. 암튼 진작 팔 걸 그랬다. 예전엔 책장 가득 가로 세로로 쌓여 있는 책을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 왔는데 이젠 저 책들이 다 돈으로 보인다.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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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나눠주고 있다   
 
Posted by 애드맨

나는 책을 안 빌려주는 주의다. 빌려줬다가 제대로 받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돈은 빌려주고 나면 생색이라도 내지 책은 생색은커녕 빌려갔다는 사실조차 까먹는 것 같았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한 번 빌리고 나면 어지간해선 그냥 까먹는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안 빌려주고 빌리지도 않고 오로지 사 모으기만 하며 살아왔는데 얼마 전부터는 책장 가득 가로 세로로 쌓여있는 책들을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심리적인 문제는 둘째 치고 책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계산해보니 부동산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헌책방에 팔려고 가격을 알아봤는데 교통비랑 인건비도 안 나올 듯 했다. 그렇다고 내다 버릴 수는 없고 해서 그냥 끌어안고 살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도 책 사기를 멈추질 못하다보니 조만간 누울 자리도 안 나올 게 뻔했다.

그래서 책을 나눠주기로 했다. 두 번 다시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은 책을 들고 나가 그날 만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최소한 고맙다는 소리는 들을 줄 알았다. 책값 생각에 처음 한 번은 어려웠는데 몇 번 하고나니 별 거 아니었다. 돈을 버린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금방 책장이 가벼워지고 숨통이 트일 알았다. 그러나 책을 그냥 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 몰랐는데 내 주변엔 책을 아예 안 읽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고맙다는 소리는커녕 기껏 지 생각해서 구매한 지 얼마 안 된 새 책을 줬더니 자기한테 공짜로 모니터 시키려는 거냐고 모니터 비용을 청구(?)하거나 짜증을 내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바에야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곳에서 책을 좋아하게 생겼거나 열심히 독서 중인 분들을 만나면 정중하게 책을 건네고 얼른 내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출판사들 힘들겠다.

 
Posted by 애드맨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돈이 좀 있다는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여럿 만나봤는데 하나같이 비슷한 말을 했다. 오천에서 일억 정도는 껌값이니 시드머니로 투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쩜 다들 짜기라도 한 것처럼 금액도 비슷하다. 오천에서 일억 사이다. 물론 인플레이션 감안하면 예전엔 좀 더 낮았던 것 같다. 자기가 하룻밤 술값으로 몇 천까지 낸 적도 있는데 그 정도 못하겠냐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듣고 나면 기대감이 안 생길 수가 없다. 보통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 계약금이 이천 정도고 선금이 오백이 안 되므로 말만 잘 들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입금시켜 줄 것 같다. 하룻밤 술값이 몇 천이라는데 오백이면 진짜 껌값이니 별 거 아닌 것 같다. 특히나 독립영화나 저예산 상업 영화를 준비할 땐 더욱 그렇다. 오천에서 일억이면 한 편 만들고 남을 수도 있는 돈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굽신거리기도 많이 했다. 그러나 그런 말 하는 사람들 중 진짜로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사람은 적어도 내 주변에선 한 번도 못 봤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진짜로 돈이 있었는 지도 잘 모르겠다. 주식판에는 아무개가 아무리 대박을 쳤다 하더라도 계좌 까보기 전엔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진리같다. 그리고 내 경험상 진짜로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없는 척을 하면 했지 있는 척을 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그런 사람들에겐 괜히 저자세로 나가면 될 일도 안 된다. 암튼 돈이 좀 있다는 사람들에게 굽신거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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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이렇겐 쓰지 마라

 

Posted by 애드맨


술을 안 마신 지 한 달 쯤 됐다. 원래 술이 잘 안 받는 체질이다.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고 취하면 무조건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럼에도 열심히 마신 이유는 술을 못 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였다. 가끔씩 술자리에서 자기는 술을 못한다며 콜라나 사이다를 시키는 사람을 볼 때마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사회생활 하려면 당연히 마셔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사회생활을 안 하겠다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는 무조건 남들만큼 마셔야 되는 줄 알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랑 일드도 한 몫 했다. 남자 주인공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목욕을 마치고 맥주 한 캔 마시는 장면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막걸리 열풍이 불면서부터는 막걸리가 건강에 좋다고 해서 집에서도 혼자서 거의 매일같이 마셔댔고 막걸리가 지겨워질 때쯤엔 수입맥주로 갈아타 또 다시 매일 같이 마셔댔다. 그렇게 매일같이 마셨는데도 별 탈이 없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술이 안 받는 체질에서 잘 받는 체질로 바뀐 줄 알았다.

그런데 올 여름쯤부터는 몸에 이상이 느껴졌다. 국산 맥주 한 병만 마시고 자도 다음 날 아침이 너무 피곤한 거다. 넘 피곤해서 블로그마저 귀찮을 정도였다. 어느 날 문득 블로그 통계에서 월별 포스팅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걸 보고 경각심을 느껴 적어도 집에서 혼자 마시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이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편의점에서 24시간 술을 팔기 때문이다. 편의점을 그냥 지나치는 게 은근히 힘들었다. 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다 싶어 담배 끊을 때 각오를 되살려 편의점을 끊었고 3주 전부터는 술자리에서도 술 못 마신다고 얘기하고 당당하게 콜라를 시켰다. 처음에는 남자답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러웠는데 몇 번 그러고 나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술이 안 받는 체질을 노력으로 극복하려 하다니 참 멍청했던 것 같다.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나니 요즘엔 몸 상태도 좋아지고 머리도 다시 맑아지는 기분이다. 진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랬는지ㅋ

Posted by 애드맨

배우에게 평소 모습 그대로를 연기해달라고는 하지 마라. 언뜻 생각하기엔 배우 아무개의 평소 모습과 극중 배역의 평소 모습이 비슷하다면 굳이 연기지도를 따로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아무개가 그냥 아무개의 평소 모습 그대로를 연기하면 아니 평소 모습 그대로 카메라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극중 배역이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인데 아무개라는 연기자가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캐스팅했다고 생각해보자.

아무개가 아무개의 평소 모습 그대로를 연기하는 거니까 별 문제 없을 것 같다. 캐스팅 잘 했다고 생각한다. 연기지도도 필요 없을 것 같고, 본인도 연기하기 편할 테니 NG도 안 낼 것 같고, 무엇보다 연기도 잘 할 것 같다. 평소 모습을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일단 우리는 아무개에 대해 잘 모른다. 아무개가 정말로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한두 번 만나서 술 몇 번 마시는 정도로는 택도 없다.


중요한 건 아무개가 진짜 내성적이라고 내성적인 연기를 잘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외향적인 경우는 조금 나을 순 있지만 별반 다르지 않다. 진짜 엄마, 아빠, 아들, 딸, 조폭, 의사, 변호사, 회사원, 재벌 2세, 아이돌 등등이라고 엄마, 아빠, 아들, 딸, 조폭, 의사, 변호사, 회사원, 재벌 2세, 아이돌 등등의 연기를 잘 하는 게 아닌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연기라는 것은 날로 먹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SNL 진중권편을 보면 알겠지만 진짜 진중권이라고 진중권 연기를 잘 하는 게 아니다. 진중권 연기만큼은 가짜 진중권이 진짜 진중권보다 훨씬 잘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는 아무개의 평소 모습’과 ‘아무개가 생각하는 아무개의 평소 모습’이 다를 수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아무개의 평소 모습은 이건데 아무개가 생각하는 아무개의 평소 모습은 그게 아닌 것이다. 그럴 경우 감독은 아무개가 연기한 걸 보고는 그게 아니니까 이렇게 해 달라고 하고 아무개는 혼란스러워진다. 분명 촬영 전에는 자기의 평소 모습 그대로를 연기해 달래서 그렇게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기껏 열심히 연기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면 기분이 그리 좋을 수는 없다. 감독이 내가 싫어서 그러는 거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설상가상 감독이 유독 어느 한 배우에게만 NG를 안 낸다면 자기만 부당하게 차별 대우 당한다고 생각하고 삐뚤어지는 수가 있다.

감독의 연기지도가 언제나 정답일 수는 없는 만큼 배우의 연기도 언제나 정답일 수는 없는데 아무개라는 배우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디션 때 처음 만나 술 몇 번 마시고 노래방 간 걸로 아무개에 대한 파악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아무개의 ‘평소 모습 그대로’를 주문했다가는 뒷감당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 어떤 배우라도 자신의 ‘평소 모습 그대로를 연기하기’ 분야에서만큼은 감독보다 자기가 더 전문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감독의 권위에 도전하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나 감독이 신인인 경우는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진다. 연기 경력이 좀 되는 배우가 신인감독 하나 바보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연기가 날로 먹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듯 연기지도도 날로 먹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배우에게 평소 모습 그대로를 연기해달라고는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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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애드맨

현재 투자는 다 됐고 캐스팅, 스태핑, 헌팅 진행 중입니다.
언젠가 '기대와우려'에 '기대된다'로 올리려고요.

그럼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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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천만 감독이 되는가_1  

Posted by 애드맨

애타게 기다리던 아무개로부터 전화는 왔다. 그동안 편성 준비 때문에 바빠서 연락을 못했다며 어쩌구저쩌구 장밋빛 청사진을 늘어놓는데 이제는 아무개의 말이 말같이 들리지가 않는다. 나도 모르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 된다. 아무개는 나를 영화과 갓 졸업하고 연출부 한 편이라도 하고 싶어 절절 매는 20대 중반으로 아는 것 같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며 향후 플랜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러시든가 말든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신뢰가 안 가니 뇌에 저장도 안 되는 것 같다.

아무개 쪽으론 깔끔하게 미련을 버리고 허망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조만간 목돈 들어올 일이 두 가지나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여기가 바닥이려니 생각했는데 그렇게까지 바닥은 아니었다. 첫 번째는 올해 극장관객수가 작년보다 늘어나리라는 확신을 갖고 몰빵한 CJ CGV 주가가 현재 삼만원대 중반인데 조만간 사만원을 넘길 것 같다는 것이다. ‘박수건달’, ‘7번방의 선물’, ‘베를린’, ‘남쪽으로 튀어’로 이어지는 라인업이 범상치가 않다. 영화마다 배급사는 다르지만 어느 영화가 잘 되든 결국엔 CJ CGV에게 좋은 일이다. ‘7번방의 선물’은 천만 넘긴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오고 여름엔 ‘설국열차’와 ‘미스터고’의 원투 펀치가 기다리고 있다. 올해는 천만 영화가 세 편 나올 수도 있겠다. 당분간 극장 주가가 떨어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두 번째는 퇴직금이다. 아직 신청은 안 했지만 실업급여도 있다. 첫 번째랑 두 번째만 합쳐도 제법 목돈이다.

아무개와의 작업이 흐지부지된 이상 이 돈으로 뭐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고민을 해봤는데 일단은 여행이 떠올랐다. 외국 안 나가본 지도 오래됐고 몇 년간 되는 일 없이 마음고생만 한 나에게 위로의 선물을 주고 싶었다. 문제는 내가 딱히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갔다 오면 빈털터리가 될 게 뻔하니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 다음은 ‘독립영화 만들기’다. CJ CGV 주가가 내 예상대로 계속 올라준다면 단편, 중편이 아니라 장편까지도 가능하다. 문제는 영화를 만들어본 지가 너무 오래됐다는 것이다. 졸업 작품을 몇 년도에 만들었는지 선뜻 기억도 안 나고 영화사 다닐 때도 현장 가는 걸 유독 싫어하는 편이었다. 만들려면 언제든 뚝딱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할 일이 너무 많다. 시나리오야 혼자 쓴다 쳐도 시나리오를 다 쓴 다음에 벌어질 일들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해온다. 4학년 워크숍 지도 교수님께서 졸업 작품이 니들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으니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만 해도 시큰둥하게 듣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교수님 말씀 틀린 게 하나도 없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제작비다. 영화 관련주에는 몰빵할 수 있어도 내 영화에 몰빵하는 건 영 꺼려진다. 비단 내 영화뿐만 아니다. 독립영화가 극장에 걸리고 손익분기점도 훌쩍 넘기는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퐁당퐁당 조기종영을 한 두 번 본 게 아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내가 그때 왜 조감독 하다 말고 기획팀에 들어갔는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감독이고 뭐고 그냥 만사가 귀찮았고 영화 관련일 하며 꼬박 꼬박 월급이나 받고 싶었던 것이다. 암튼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단 시나리오는 써봐야겠다. 내가 연출할 시나리오를 쓰는 게 진짜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넘 신난다 ㅠㅜ

지난 이야기
나는 어떻게 억대 드라마 작가가 되는가_3 
 

Posted by 애드맨

작년 12월 중순인가? 아무개에게 시놉을 보내고 거의 3주 만에 연락이 왔다. 지난번에 보낸 시놉을 아무개랑 친한 대표님에게 보여줬는데 매우 마음에 들어 하셨고 같이 개발해보고 싶어 하신다고 하셨다. 잘하면 계약까지는 몰라도 진행비는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기사에서 몇 번 뵌 적이 있는 대표님이 내가 쓴 시놉을 마음에 들어 하셨고 잘하면 진행비까지 나올 지도 모른다는 말에 솔깃해서 아무개의 의견을 반영해 이번엔 좀 더 길게 써서 보내줬다. 혹시나 해서 우리 회사 대표님에게도 보여줘 봤는데 역시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심사숙고 끝에 회사를 그만뒀다. 솔직히 이대로라면 큰 이변이 없는 한 올해도 작년이나 재작년처럼 지지부진하게 보낼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일이 이렇게까지 안 풀리는데도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을 면목이 없었다. 월급이 매우 적은 것 빼곤 회사엔 아무런 불만이 없고 나가라고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고 안정적인 다른 수익원 덕분에 이렇게 꼬박 꼬박 제 때 월급을 주는 회사도 흔치 않지만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자리를 양보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대표님은 딱히 만류하는 눈치는 아니었고 요즘 같은 세상에 나가서 뭐 하려고 그러냐고 걱정해주셨다. 나는 새해가 되기 전에 새로운 길을 모색해보고 싶다고만 했다. 내가 유능하다고 생각했다면 나가서 뭐 할지 걱정은 안 해주셨을 거란 생각에 기분이 조금 착잡했다. 대표님은 실업급여나 퇴직금 문제는 잘 처리해 줄 테니 나중에 잘 돼서 다시 보자고 하셨다. 나름 오랜 기간 몸담은 회사였지만 섭섭하진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처음 한 번이 싱숭생숭하지 몇 번 반복되니까 그냥 무덤덤할 뿐이다. 지난 몇 년간을 돌이켜보니 회사에서 의욕적으로 뭔가를 추진하다가 잘 안 풀리면 차라리 혼자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그만뒀다가 혼자서는 도저히 답이 안 보여서 다시 회사에 들어가길 반복하기만 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그만두기 전에 회사가 먼저 망한 적도 있다.

암튼 이젠 잘 쓰는 일만 남았다고 각오를 다지며 아무개에게 전화해 회사를 그만뒀다고 했더니 왜 그랬어? 설마 이 프로젝트 때문에 그만둔 건 아니지? 라고 걱정해주었다. 예전에 당장 회사 때려치우고 니 작품 쓰라고 했던 때와는 전혀 다른 뉘앙스라 당황스러웠지만 니 프로젝트도 열심히 하고 장기적으로는 내 작품에 전념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했다. 아무개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올인해서 열심히 해보라며 연말 잘 보내고 새해에 다시 통화하자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게 3주 전쯤인데 그 이후로 이렇다 저렇다 별 말이 없다. 조만간 다시 연락 주겠다는 말만 반복한다. 당연히 진행비 얘기도 없다. 실업급여를 신청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이대로라면 실업급여를 신청해야 될 것 같다.

요즘엔 가끔씩 나에게 시나리오를 보내고 연락을 기다렸을 작가님들 생각이 난다. 기본이 1주일이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때로는 한 달 이상 기다리게 만들었는데 내가 잘못했다. 꼭 벌 받는 기분이다. 내 경험상(?) 한 달 이상 연락이 없으면 십중팔구 나가리됐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이 경우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지난 이야기
나는 어떻게 억대 드라마 작가가 되는가_2  

Posted by 애드맨


아무개와의 미팅 이후 너무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다음에 전화가 오면 씹으려고 했는데 막상 며칠 뒤에 전화가 오자 차마 씹지 못하고 받아버렸다. 아무개는 그 때 얘기했던 거 어떻게 되어 가냐고 진행상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난 얼떨결에 요즘 일이 바빠서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했고 아무개는 수고하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아무개와의 통화 이후 고민을 좀 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개의 아이템을 A4 두어 장 정도로 정리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냥 기억을 되살려 아무개가 해 준 말만 그대로 옮겨 적어도 A4 세장은 나올 것 같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기 전에 딱 3~40분 정도만 투자하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시험 삼아 잠깐 시간을 내서 정리해보았다.

진짜 30분도 안 걸렸고 정말 쉬운 일이었다. 다 쓰고 나서 읽어보니 제법 그럴 듯 했다. 내가 드라마에 대해 잘 몰라서 과연 이 정도 아이템이 드라마가 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어차피 나중에 네임밸류 있는 기성 작가가 와서 다시 쓴다니까 무슨 이야기인지만 전달될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이것도 일이라고 막상 다 하고 나니까 기분이 업 되어서 아무개가 보내준 지금 편성 준비 중이라는 드라마의 기획안도 꼼꼼히 읽어보았다.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 왠지 드라마로 만들어지기 힘든 이야기 같았지만 그냥 시청자의 입장에서 A4 두어 장 분량으로 모니터를 작성했다. 막상 아무개가 시킨 일을 다 해놓고 나니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도 안 주고 일 시키려든다고 뒷담화만 까고 있는 것보단 훨씬 생산적이었다. 한동안 느낀 적이 없는 성취감도 느껴졌다.

아무개에게 기획안과 모니터를 이메일로 보내기 전에 과연 이걸 보내는 게 맞는 건지 누군가와 상담을 하고 싶었지만 돌아올 대답이 뻔할 뻔자여서 그냥 참았다. 만약 누가 나한테 이런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하지 말라 그랬을 것이다. 솔직히 이 나이에 이런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쪽팔리고 그걸 시킨다고 다 했다는 사실도 쪽팔렸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 아무도 모르긴 하지만 그냥 나 스스로에게 쪽팔렸다. 그나마 다행인건 드라마 쪽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쪽팔릴 일은 없다는 것이다. 잘 돼서 뭔가 껀수가 생기면 땡큐고 안 된다 해도 딱히 내가 손해보는 건 없다. 아이템을 정리하면서 창의적인 고민을 한 것도 아니고 딸랑 한시간 반 정도 투자한 게 다니 그냥 안 좋은 경험했다 치고 잊어버리면 된다.

예전에 내 입으로 ‘돈 안 주면 쓰지 마라’ 그래놓고 딴 소리를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좀 묘한데 사실 그렇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고 사람 일이라는 게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 때론 융통성을 갖는 게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누가 돈 주기 전까진 죽어도 안 쓰겠다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어봤자 누가 찾아와 돈 주면서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는 일은 절대로 안 생긴다. 물론 공모전 당선의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게 사실이고 공모전에만 당선되면 누가 찾아와 돈 주면서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언제까지고 마냥 공모전 당선만 기다리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시간 금방 간다. 금방 마흔되고 오십된다. 잘 생각해보고 기회라고 생각되면 잡아야 한다. 그래서 아무개에게 기획안과 모니터를 이메일로 보냈다. 핸드폰으로 이메일 확인하시라고 문자도 보냈다. 금방 답장이 왔다. 수고했어 ^^

이번 일을 계기로 억대 드라마 작가로 발돋음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흐뭇했다. 문제는 이메일을 보내고 나서 열흘 정도 지났는데 아직 연락이 없다는 것이다. 수신확인을 해 보면 읽음으로 나오고 카톡 프로필 사진이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걸 보면 분명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관련 포스팅
돈 안주면 쓰지 마라

지난 이야기
나는 어떻게 억대 드라마 작가가 되는가 

Posted by 애드맨

다 필요없고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가 최고라는 말을 자주 하긴 했나보다. 오다가다 술자리에서 몇 번 만난 적 있는 드라마 업계 종사자로 알고 있는 아무개에게 전화가 왔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다.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고 할 이야기란 것도 별 거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전화로 하시면 안 되냐고 했더니 전화로 하기엔 좀 애매하니까 일단 만나자고 했다. 며칠 후 약속 장소에 정시에 맞춰 나갔는데 안 오는 거다. 혹시 내가 시간을 착각했나 싶어 전화를 했더니 갑자기 일이 생겨서 좀 늦겠다고 한다. 근데 내가 건물 2층에 위치한 카페 창가에 앉아있었는데 맞은 편 건물 1층 핸드폰 가게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아무개가 보인다. 일이 생겨서 늦는다는 사람이 왜 저기 있지? 설마 다른 사람이겠지 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아무개가 맞다. 판매원이랑 무려 상담 중이시다. 아무개는 결국 50분 정도 늦었다.

카페에 들어와 내 앞 자리에 앉는 아무개에게 요즘 바쁘신가봐요?라고 물었더니 드라마 편성 때문에 바쁘다며 작가님이 어쩌구 저쩌구 정확히 뭐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암튼 엄청 바쁜 척을 한다. 핸드폰 가게에서 상담하고 있던 거 다 봤다고 이야기하려다 어떻게 나올 지 궁금해서 끝까지 모르는 척 했다. 아무 것도 안 마시고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더니 목이 말랐지만 아무개가 만나자고 한 거니까 아무 것도 안 시키고 있었는데 아무개는 아무 것도 안 시키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름이 아니고 내가 드라마를 하고 싶어 한다는 얘길 몇 번 들었다며 혹시 아이템이 있으면 자기에게 갖고 와보라는 것이다. 딱히 없다니까 그럼 자기 아이템을 기획안으로 정리해보라고 한다. 뜬금없이 뭔 소린가 싶어 가만히 있었더니 바로 말을 이어갔다. 난 니가 걱정이다. 기획팀 백날 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 니 영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안 알아주는 거 너도 알지 않냐. 회사 천년만년 다닐 것도 아니고 그 나이 먹도록 내세울만한 경력도 없고 공모전에서 대상 먹은 것도 아니면 이 바닥에서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더 나이 들기 전에 감독이든 작가든 쇼부쳐야 된다. 내가 영화 쪽은 잘 모르지만 드라마 쪽은 좀 알고 어차피 드라마 작가 하려면 기획안이나 시놉쓰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혼자 하긴 힘드니까 내가 도와주겠다. 암튼 한 번 써서 갖구 와봐라. 싹수가 보이면 어떻게든 이 바닥에 입문은 시켜주겠다. 그 다음엔 니가 알아서 하면 된다.

살짝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맞는 말이긴 하고 진짜로 나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길래 모든 걸 내려놓고 물어봤다. 주변에 작가가 없나요? 똘똘한 애는 없어. 기획안 정도는 직접 쓰시면 되잖아요? 난 바빠서 도저히 시간이 안 나. 그럼 아이템을 정리해서 갖고 가면 어떻게 되나요? 작가에게 넘겨야지. 네? 어차피 신인은 편성이 안 되거든. 지상파 드라마는 작가 네임밸류가 중요하잖아? 신인으론 때려 죽여도 안 되나요? 음.. 16부까지 다 써서 갖고 온 게 재밌어도 될까말까. 그럼 아이템 정리해서 작가에게 넘기고 난 다음엔 뭘 하나요? 그때가면 또 할 일이 생길거야. 아 맞다. 내가 얘기했었나? 니가 좋아하는 그 유명 작가님도 내가 잘 아는 피디님이랑 연결시켜준거야. 내 덕분에 입봉한 셈이지. 암튼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란 얘긴 아니니까 틈틈이 정리해서 한 번 갖구 와 봐.

이런 식의 제안(?)은 영화과 갓 졸업했을 때 몇 번 받아보고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요즘 영화 쪽에서 이런 제안을 하면 바로 양아치 소리를 들을 텐데 드라마라 좀 애매했다. 드라마 쪽은 원래 다 이렇게 하나? 가장 궁금한 건 돈 얘긴데 아무개가 지금 나에게 일을 시키겠다는 건지 공짜로 드라마 강의를 해 주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서 가만히 있었더니 자기가 먼저 돈 이야기를 꺼낸다. 당장 돈은 못 주지만 향후 일이 잘 진행되면 수고비 정도는 챙겨 줄 수 있어. 만약 회사 나오고 싶은데 갈 곳이 없으면 우리 사무실에 책상 하나 정도는 만들어 줄 수도 있으니까 걱정 말고.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내 아이템이 뭐냐면~

아무개는 그렇게 한참을 자기 아이템 이야기를 했고 나는 얼떨결에 다 들어버렸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수첩을 꺼내 메모하는 척도 했다. 내가 메모하는 척 하니까 흐뭇해하며 기획안 쓸 때 참고하라고 지금 편성 준비 중인 드라마의 기획안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한참 열심히 이야기하다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작가님이랑 약속이 있다며 이야기를 흐지부지 마치고는 내년 가을 편성이 목표니까 최대한 빨리 정리해서 갖고 와 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알았다고 한 후 헤어졌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다.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의 고수입을 부러워하는 그 나이 먹도록 내세울만한 경력도 없고 공모전에서 대상 먹은 것도 아니어서 이 바닥에서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사람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악용하나? 카페에서 아무 것도 안 시키고 세 시간 가까이 앉아 있던 것도 쪽팔리고 다음에 전화 오면 씹어야겠다.

지난 이야기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비공식업무일지

Posted by 애드맨

엘리트 인턴이 회사를 그만뒀다.


늘 보이던 엘리트 인턴이 안 보이길래 무슨 일인지 친구 인턴에게 물어보니 이번 주부터 안 나오기로 했다고 문자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아무리 한국 영화계가 어렵고 여기가 망해가는 영화사라지만 그래도 몇 달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는 건데 문자 한통으로 회사를 그만두다니 이건 마치 회사를 자기가 다니던 명문 대학교 영화 동아리보다도 우습게 생각하는 것 같아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역시 나의 사람보는 안목은 제법 정확하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맨 처음 엘리트 인턴을 본 순간 오래 다니지는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영화계에도 국내, 해외 명문대 학벌이 널리고 깔렸지만(이제는 대부분 떠난 것 같긴 하지만) 엘리트 인턴은 명문대 중에서도 명문대를 졸업했고 토익 점수도 만점에 가깝고 외국에서도 오래 살았고 제2외국어도 잘하고 집도 잘 산다고 하고 일처리도 빈틈없으면서 꿈이나 이상과는 거리가 먼 매우 현실적인 마인드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지금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성공할 확률이 낮더라도 언젠가는 극장에서 영화 엔딩 크레딧에 자기 이름 석자 올라가는 것을 보기 위해 청춘을 홀라당 갖다 바칠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루는 술자리에서 엘리트 인턴에게 무슨 생각으로 영화사를 다니는 건지 슬쩍 떠 보면서 대학 졸업한 지도 얼마 안 됐고 나이도 어리니 다시 공부해서 방송국이나 대기업을 뚫어 볼 생각은 없냐고 물어 본 적이 있다. 엘리트 인턴은 잠시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냥 영화가 좋아서 영화사를 다닐 뿐이라고 대답했는데 거짓말이라는 느낌이 왔지만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인턴이 직원에게 회사 생활에 도움이 될 리 없는 진심을 얘기해서 손해보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특별히 친한 사이도 아니고...


의리없이 혼자만 잘 살아보겠다고 대학교 영화 동아리 탈퇴하듯 망해가는 영화사를 문자 한통으로 때려친 엘리트 인턴은 엔터테인먼트 전문 변호사가 될 거라며 로스쿨 입시 학원에 등록했다는데 잘하면 3년 후에 아는 변호사 한 명 생길 지도 모르겠다.


엘리트 인턴이 3년 후에 변호사가 될 때 나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3년이라면 긴 시간인 것 같아도 영화 한편을 시나리오 단계부터 준비해서 극장 개봉까지 시키기엔 조금 아슬아슬하게 모자랄지도 모르는 시간이다. 3년 전의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지금부터 3년이 지난다고 해도 극장 개봉 영화 엔딩 크레딧에 내 이름 석자 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과연 지금 준비하는 아이템을 3년 내로 극장 개봉시킬 수 있을까?


만약 앞으로의 3년을 지난 3년처럼 영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니면서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블로그에 진솔한 고민만 늘어놓으면서 하염없이 흘려보내다가 우연히 극장이나 길거리에서 3년 동안 로스쿨을 졸업한 뒤 엔터테인먼트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엘리트 인턴을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되도 않는 영화하겠다며 찌질하게 산다고 무시당할까봐 걱정된다. 3년 동안 뭘 해야 나중에 무시 안 당하고 잘 살 수 있을까? 아직도 영화해요?라는 소리만큼은 듣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 떠날 줄 알았으면 있을 때 조금이라도 잘 해줄 걸 그랬다.

하여간 이젠 인턴들도 몇 명 남지 않았다.


Posted by 애드맨

간만에 시나리오를 한번 써 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한글 프로그램을 열고 빈문서를 보자마자 한 숨이 나왔다.


오리지날 창작 시나리오도 아니고 내가 창작해낸 번뜩이는 기본 설정 하나로 밀어붙이는 우라까이 짜깁기 시나리오여서 금방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빈문서1를 띄우고 글자를 입력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무리 막장 쌈마이 시나리오라도 6~70장을 글자로 채우려면 2박 3일은 걸리는데 그동안 게임도 못하고 TV도 못 보고 놀러 다니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창작 의욕이 사그라든다. 과거 내가 쓴 시나리오들이 제대로 빛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는 자격지심에 키보드에 손가락조차 안 올라간다.

그래서 얼마 전에 신생 영화사로부터 무보수로 일단 한번 써와보라는 각색 의뢰를 거절한 후 자택에서 칩거 중인 작가 지망생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구상 중인 아이템이 하나 있는데 집에서 마냥 노느니 투자하는 셈 치고 한번 써 볼 생각 없냐고 물어보았다.


우리가 그냥 남도 아니고 어두운 시절을 함께 하고 있는 돈독한 사이니까 이럴 때 일수록 서로 도와 나중에 둘 중 하나라도 잘 되면 잘 나가는 넘이 못 나가는 넘을 끌어 주는 밝은 미래를 설계해보자고 제안하니 계약금은 안 줘도 좋으니까 최소한의 진행비만 달라고 한다. 진행비를 받고 쓰면 순수한 의미의 투자가 아니지만 굳이 달라면 주겠는데 얼마면 되겠냐고 물어보자 아무리 적어도 좋으니 자기도 한번 돈이란 걸 받아보고 뭔가를 써보고 싶을 뿐이란다.


친구에게 구글의 공동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그리고 회장 겸 CEO인 에릭 슈미트의 연봉이 1달러였다는 얘기를 해주며 우리도 구글처럼 시작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하니 금액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러겠다고 했다. 친구는 돈이란 걸 받아보고 시나리오를 써 보는 경험이 어떤 건지 너무 궁금하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자기가 쓴 시나리오가 영화화되서 올해 안으로 극장에 걸린다는 보장만 있다면 돈 따위는 안 받아도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친구의 계좌번호를 받아적은 후 바로 빈문서를 닫고 은행 홈페이지에 들어가 구글의 회장 겸 CEO가 받았던 연봉 1달러보다는 많은 금액을 친구의 계좌로 보내주었다.


사기는 거래에 있어서 신의를 배반하고 거짓말로 속여서 재물 등의 이익을 취하는 행위, 재산 상의 신뢰침탈 행위를 말하고 사기죄의 요건으로서의 기망은 널리 재산상의 거래관계에 있어서 서로 지켜야 할 신의와 성실의 의무를 저버리는 모든 적극적 및 소극적 행위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착오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피해자는 사기꾼을 믿다가 속고, 사기꾼은 피해자의 신뢰를 이용해 속인다는데 어째 남의 얘기 같지가 않지만 우리는 암울한 시절을 함께 하고 있는 오랜 친구 사이니까 나중에 잘 안되더라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옛날엔 내가 술도 많이 샀다.


친구와의 신뢰를 이용한 거래를 마치는 순간 이 바닥에서 사기를 치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뜻이고 누가 뭐라건 독한 마음 먹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기회가 온다고 조언해준 선배가 생각났다. 선배의 소식을 들은지 너무 오래됐길래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근황이 궁금해서 생각난 김에 전화를 해 보니 핸드폰이 꺼져있다. 선배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보통은 카드 빚 독촉 때문에 핸드폰을 꺼두니까 연락할 일 있으면 문자를 이용하라고 했던 기억이 나서 안부 문자를 보냈는데 아직 답장은 없다.

선배는 잘 버티고 있을까?

Posted by 애드맨

과거에 함께 단편영화를 찍었던 아는 형과 술을 한 잔 마셨다.


앵글에 대한 감이 뛰어나고 조명도 잘 친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아는 형은 한달 내내 촬영 일정이 잡혀있어 눈코 뜰 새 없이 바빳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는 카메라를 잡아본 지 2년이 넘었다고 했다. 졸업과 동시에 최고의 단편영화 촬영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후 충무로 A급 촬영 감독의 팀에 들어간 것까진 좋았는데 A급 촬영 감독의 일꺼리가 떨어진 것이다.

영화계의 절대 불황 앞에선 아무리 앵글을 잘 잡고 조명을 잘 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나보다. 한국영화계에 눈먼 돈이 넘쳐나 입봉 못하면 바보라는 소리가 있던 재작년, 작년 2년 동안 입봉은 커녕 촬영장 구경조차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는 않았으나 이러저러한 개인 사정 때문에 잠깐 재충전의 시간을 갖으려다 번번히 촬영팀에 합류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문제는 내가 형에게 술을 사줄 형편이냐는 것이다. 아무리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어버릴 단편영화를 찍어보자고 의기투합했던 사이라지만 이제는 나도 힘든 마당에 누가 누구를 위로한다고 술을 사나. 물론 단편영화 촬영 당시 내가 실험적인 영화 찍어보겠다고 스텝들 고생시킨 거 생각하면 당연히 술을 사야 되고 내 영화가 해외 유명 영화제에 진출하게 되면 데려가 줄 수도 있다며 무리한 연기를 몇 번이고 강요했던 배우들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이젠 다 옛날 일이라 잊어버리려 노력 중이다. 그들도 다 잊어버렸길 바란다.


전에 다니던 망해가는 영화사가 잘 나가던 시절만 해도 한국에서 월급 받으며 영화하는 건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술값으로 뿌리고 다녔는데 이제는 기분 좋게 술 한 잔 살 수 없는 신세가 되버렸다. 물론 월급을 아무 생각없이 뿌리고 다닌 건 아니다.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진 몰라도 이게 다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오늘 내 지갑에서 나가는 몇 만원 정도의 술값이 몇 년 후엔 수억원 혹은 수십억원 단위의 껀수를 물어올지도 모른다는 태평스러운 생각을 했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호기롭던 시절은 몇 개월 뿐이었다. 언젠가부터는 누가 술값을 내는지 정해지지 않은 술자리는 나가기 귀찮아졌고 심지어는 친한 친구랑 밥을 먹어도 내가 연속으로 두 번 정도 사게 되면 왠지 손해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날은 잠자리에 들어도 다음에는 내가 얻어먹어야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나마 돈만 생각하던 시절은 양호했던 것 같다.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 같은 무의미한 자리에는 누가 밥이 아니라 술을 사준다 해도 나가기 싫어졌다. 나이를 한살 더 먹고 나니 시간이 돈보다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소득 없는 자리에 나가서 시간을 낭비할 바에야 차라리 혼자 방에서 게임이나 하는게 더 나은 것 같다.


아는 형과 술을 마시며 단편영화 찍던 시절 얘기를 하다보니 단편영화를 잘 찍어 장편영화를 찍을 기회를 잡게 되면 반드시 대박영화 감독이 되서 1년은 영화를 찍고 1년은 해외 영화제를 순회해야겠다는 허무맹랑한 계획을 세웠던 기억이 났다.


술값은 형이 냈다.

Posted by 애드맨

회사의 넘버 투이자 진정한 실세인 마케팅 팀장에게 야심차게 들이밀었던 원작 아이템을 퇴짜 맞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런 마이너스럽고 천박하고 여성 비하적인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않을 것이고 기적적으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대박은 커녕 쪽박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누가 보고 싶어할 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며 추격자도 성공하는 마당에 와이낫이냐고 묻는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굳이 진행하고 싶다면 망해가기 직전의 우리 영화사 말고 돈도 많고 여유도 있는 영화사에 가라고 했다. 그나마 내 얼굴 봐서 끝까지 읽어봤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보여줬다면 읽지도 않았을 거라고 덧붙였다.


나는 기획서를 보면 알겠지만 굳이 극장 흥행이 안 되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루트를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대안들을 마련해두었고 어쩌면 보너스로 흥행이 잘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잘 좀 봐달라고 했지만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흥행이 잘 될 것 같냐고 물어보길래 딱히 할 말이 없어 농담삼아 직감이라고 대답했더니 피식 웃으며 다른 루트를 통한 수익의 가능성도 짐작일 뿐이니 고려 사항이 아니고 흥행이 잘 될지도 모른다는 나의 직감은 적중률이 낮아서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끼리 재미삼아 하는 개봉영화 흥행예상의 적중률이나 높여보라며 내가 건넨 기획서는 안 본 걸로 하겠다는 말과 함께 고이 접어 돌려주었다.

내가 기획한 작품이 무사히 메이드가 되고 제법 괜찮은 흥행 성적까지 올렸다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텐데 단지 신뢰할만한 경력이 없고 내가 들이민 원작 아이템이 흥행이 잘 될 수도 있다는 직감을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반론을 할 수 없는 현실이 한심하기만 했다. 다행히 회의실엔 마케팅 팀장과 나 둘 뿐이었길래 망정이지 인턴들이 우리 둘의 대화 내용을 들었더라면 엄청 쪽팔릴 뻔했다.


이대로 물러나긴 억울해 뭐라고 토를 달고 싶어도 마케팅 팀장이 나보다 영화 경력도 많고 나이도 많고 학벌도 좋고 상당한 미모를 바탕으로 한 영화계의 인맥도 넓어서 도저히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참여한 작품 수로 기싸움을 벌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하다. 연출부나 제작부 혹은 기획팀 직원으로 작품 제작에 참여해 한 편을 끝내려면 최소 반년에서 일년은 걸리지만 마케팅 업계에서 반년 정도 일하면 최소 서너 작품은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케팅 팀장만 오케이해준다면 대표에게도 마케팅 팀장이 괜찮게 봤다는 말과 함께 자신있게 들이밀 수 있을텐데 같은 사무실 사람조차 설득을 못 시켰으니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진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로서 마케팅 팀장을 내 편으로 만들고 대표를 설득시켜 회사에 남은 돈을 몰빵해 원작 판권을 구매한 다음 A급 작가에게 각색을 맡기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마케팅 팀장이 안된다면 대표도 안된다고 할테니 작품 진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원작 판권 구매도 물 건너갔다.


원작 판권 구매가 어렵다고 아이템을 포기하기는 싫고 그렇다고 표절을 할 수는 없으니 일단은 나 혼자 우라까이라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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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의 2008년 각색 버전 시나리오가 나왔다.


어딜 고쳤는지는 알겠는데 그거 몇 군데 고쳤다고 6년째 못 들어가던 작품이 들어가게 될 것 같진 않았다. 자체 모니터 결과 문제점이라고 지적되었던 부분은 여전히 변함없고 감독님이 특별히 신경써서 고친 걸로 보이는 부분은 왜 고쳤는지 의도를 잘 모르겠다. 내가 삐딱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나보다 작품 경력이 훨씬 많은 마케팅 팀장도 시나리오 회의 내내 이게 뭐가 재밌다는지 모르겠다는 못 마땅한 표정이었다. 


감독님이 아무리 영화를 오래 전에 시작했더라도 작품 경력은 마케팅 팀장이 훨씬 많고 결정적으로 초대박 작품의 마케팅에도 참여한 적이 있기 때문에 말빨은 훨씬 강력하다. 대표님도 언제나 마케팅 팀장의 의견을 듣고 뭔가를 결정하는 분위기고 무엇보다 나이트클럽이나 길거리에서 만났다면 쉽게 말 걸기 힘들 정도의 상당한 미인이기 때문에 무슨 얘기를 해도 다 맞는 말처럼 들린다. 한마디로 실세이자 넘버 투인 셈인데 그런 마케팅 팀장이 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의 2008년 각색 버전 시나리오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1년 더 각색해야 될 것 같다.


마케팅 팀장은 요즘 관객들 취향이 아니라서 마케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은 전부 수정해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하고 일이 있어 죄송하다며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감독은 마케팅 팀장이 나가자마자 길게 한숨을 쉬었고 시나리오 회의 내내 대표님이 참석하지 않는 회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피디는 대표님이랑 얘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 통화가 안된다며 사무실엔 언제 나오시냐고 물어보았다. 그리고 우리끼리 얘긴데 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은 여성 관객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마케팅 팀장의 말대로 작품을 수정하긴 곤란하다며 옛날에 친하게 지냈던 매니저를 통해 어느 A급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넣어둔 상태고 만약 그 A급 배우가 하겠다고만 하면 또 다른 A급 배우도 캐스팅할 자신이 있으니 일단은 시나리오 각색 방향은 감독에게 맡겨두는 게 좋겠다고 대표님에게 전달해달라고 했다.


6년째 각색중인 작품의 시나리오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 오자 영화사 알바 경험이 있는 모 인턴이 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의 씬별 등장인물 감정선과 호감도를 그래프와 도표로 만들어서 메신저로 보내주었다. 이게 바로 예전에 박정우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기획실 직원인가 뭔가 하는 것들은 무슨 논문이라도 쓰듯이 그래프까지 그려가면서 시나리오의 문제점 적발에 최선을 다하고 자빠졌고’의 바로 그 논문처럼 쓰여진 그래프였다. 그래프가 컬러플하길래 프린트 잉크가 아까웠지만 일단은 수고했다고 칭찬은 해줬는데 감독에게 보여줬다간 개뿔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 사무실 나와서 할 일 없으니까 시나리오 문제점 적발에 최선을 다하고 자빠졌고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내 컴퓨터 속의 기타 폴더에 곱게 저장해두었다.


6년째 각색중인 감독님은 시나리오 회의가 끝났으니 오랜만에 회포도 풀겸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했는데 다들 바쁘다고 몸을 사리는 분위기여서 나도 일이 있어 죄송하다며 일찍 사무실에서 나왔다. 감독님의 섭섭해하는 얼굴을 보니 조금 미안했는데 나도 이젠 늙고 지쳐서 술도 잘 안 받고 심적으로 여유가 없다. 감독님은 본인이 봉준호나 김지운처럼 잘나가는 유명 감독이라면 이런 홀대는 받지 않을텐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술자리에 참석한다고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껀수 없는 맹목적인 술자리는 집에 갈 때 허탈할 뿐이다. 나도 요즘 힘들다. 감독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마 감독님이 봉준호나 김지운이라면 전직원이 술자리에 참석했을 것이고 대표님도 회의에 참석했을 것이다. 상상하면 마음만 아프니 여기까지.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추천했던 원작 아이템을 간단하게 정리해봤는데 대표는 만나기 힘드니 일단 마케팅 팀장님에게 보여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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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진행하고 싶어하는 작품 관련해서 뭣 좀 물어보려고 대박 영화사 직원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오랜만의 통화라 반가운 척 하고 아쉬운 소리해가며 뭣 좀 물어봤더니 후배는 얼마 전에 대박 영화사 관두고 딴 일 하고 있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왜 남들 다 부러워하는 대박 영화사를 관뒀냐고 물어보니 대박 영화를 만들긴 했지만 쪽박 영화가 더 많아 회사 분위기는 점점 안 좋아지고 도저히 버티기 힘든 상황이 되서 관뒀다고 했다.


아니 대박 영화를 만든 대박 영화사 직원이 회사 사정 어렵다고 딴 일 하면 쪽박 영화사 직원들은 벌써 다 때려쳐야겠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는 순간, 알고 지내던 쪽박 영화사 직원들 뿐만 아니라 몇몇 대박 영화사 직원들 중 상당수가 이미 영화사 관두고 딴 일을 하고 있거나 일자리를 알아보는 중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후배는 나의 실없는 우스개 소리에 전혀 반응이 없더니 지금 뭣 좀 하느라 바쁘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맞다. 그랬었다. 요즘 내 생각만 하느라 남들 뭐 하는지 별 관심이 없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젠 정말 몇 명 남지 않은 것 같다. 전에 다니던 망해가는 영화사의 대표님은 회사 관두고 1~2년 내로 이 바닥에서 뭐든 하지 못하면 앞으로 월급 받으면서 영화하기는 힘들테니 그냥 딴 일 찾는게 나을 거라고 했는데 정말 월급 받으면서 영화하는 시절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돌아오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럼 월급을 주면서 영화해야 되나?


갑자기 이런 어려운 시기에 사무실 유지하며 영화사 간판 걸어놓고 있는 우리 대표님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다만 사무실에서 대표님 얼굴 보기가 점점 힘들어 지는데 낮에는 주로 어디서 시간을 보내고 계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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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배우DB 구축 작업을 벌써 끝내버렸다.


업무시간 틈틈이 취미생활 하듯 천천히 하라고 시킨 일을 몇 일 만에 끝내버리다니 기껏 생각해서 일꺼리를 만들어준 나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아 조금 짜증이 났지만 인턴 친구들과 힘을 모아 공동으로 작업 했기 때문에 빨리 끝낼 수 있었다며 해맑게 미소짓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숙연해졌다.


어쩐지 인턴들이 요즘엔 다들 퇴근도 늦게 하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수근대는 일도 잦았는데 그게 다 배우DB 구축 작업 때문이었다. 언제나 진지하고 고지식해보이는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에게 장난삼아 시킨 업무를 입사 동기들끼리 힘을 모아 퇴근 시간까지 늦춰가며 열심히 작업하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북 받쳐 올라 눈물이 날 뻔 했으나 티는 내지 않았다.


사실 배우DB 자료는 다른 영화사에서 일하다 그만둔 친구에게도 있고 그 친구에게 없더라도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자료라서 특별히 새로 만들 필요도 없었는데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매달려 몇 날 몇일을 힘들게 작업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가슴 찡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실용적이지도 않은 배우DB자료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어린 청춘들 쌩노가다 시켜놓고 정작 나는 한국영화 희망없다는 혼잣말만 블로그에 늘어놓고 타인의 노력을 비웃으며 인턴들이 추천한 원작 아이템들은 퇴짜놓고 대표나 다른 직원들 눈치나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지금이라도 초심으로 돌아가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연료로 다시 한번 열심히 뛰어보고 싶어도 나는 처음 영화를 하려고 마음먹었던 초심부터가 시니컬했기 때문에 아예 다시 시작하는 수 밖에 없다.


예전에 어떤 선배는 보통 영화사 하나가 망할 조짐이 보인 다음 완전히 망하기까지는 1년이 걸린다는데 그 이론에 의하면 지금 다니는 영화사가 망하기까지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반년 정도가 남은 것 같다. 이 영화사마저 전에 다니던 망해가는 영화사처럼 영화 하나 변변히 개봉도 못시켜보고 망해버린다면 나는 망해가는 영화사만 골라서 다니는 재주가 있거나 아니면 영화사를 망하게 하거나 스텝으로 참여한 영화의 흥행을 쪽박차게 만드는 초능력이 있는 셈인데 어느 쪽이라도 더 이상은 영화일을 하고 싶지가 않을 것 같다.


요즘엔 개봉영화 크레딧에 마지막으로 이름이 올려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얼마 전에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언급했던 마이너 느낌 그윽한 원작 아이템이 머리 속에서 잊혀지지가 않는다. 너무 어둡고 극단적이고 비호감이어서 20대 초중반의 여성관객이 좋아할리 없지만 스크린에서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대표에게 어떠냐고 물어봐야겠다.


인턴들의 배우DB는 안타깝지만 내가 예전에 혼자 만든 배우DB보다는 퀄리티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나 시니컬하게 잔소리만 해대면 괴팍하다는 소리 밖에 못 들으니 이제는 남의 열정을 비웃지만 말고 또 다시 망해가는 영화사에 몸을 담았다고 궁시렁대지만 말고 영화사가 망할 때 망하더라도 다시 한번 뭔가 해보려고 노력해보고 싶어지는 희망찬 금요일 밤이지만 월요일까지 희망참을 유지할 자신은 없다.

Posted by 애드맨

모 감독님께서 예전에 일 시켜놓고 돈을 못 줘서 미안하다며 그 때 주기로 했던 돈을 입금시켜주셨다.

살다보니 별 일을 다 겪는구나 싶을 때가 많은데 이런 일은 또 처음이다. 일은 열심히 했는데 투자가 안 되면 니가 일을 잘 했으면 투자가 됐을 텐데 니가 일을 못했기 때문에 투자가 안 되는 거라며 주기로 한 돈을 못 주겠다는 경우를 몇 번 겪어봤기 때문에 모 감독님의 이번 입금 사건은 더더욱 별 일처럼 느껴진다.


모 감독님은 키도 크고 미남이시고 일을 시켜놓고 돈을 주기로 했으면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못 주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주기로 했던 돈을 입금시켜주시는 사회에 귀감이 될 만한 성품의 소유자이시니 그 때 같이 준비했던 작품도 반드시 대박이 터질 것만 같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모 감독님은 사람이 너무 좋아 주변 지인들에게 빌려줬다가 못 받은 돈이 많아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있다던데 어떻게 이런 선행을 베풀 수 있는지 궁금하지만 돈의 출처까지는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작품 준비 잘 되기만을 빌 뿐이다.


비록 모 감독님의 데뷔작은 뛰어난 작품성에 비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흥행 쪽박을 찼지만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보다 더 기대가 된다. 나에게 2008년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기대주는 모 감독님이시다. 모 감독님 화이팅!

Posted by 애드맨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요즘 힘들어한다.


다른 인턴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업무 시간을 야무지게 잘 보내고 있는 반면에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은 하루빨리 대박 아이템을 발굴해서 회사를 자신의 힘으로 메이저의 대열에 올려놓고야 말겠다는 강박관념이 있는지 온 종일 열심히 뭔가를 뒤적거리고 인상만 쓰고 있다. 사무실에서 뒤적거려봤자 방법은 누구나 다 하는 웹써핑 뿐이고 뒤지는 싸이트라고 해봤자 나도 가는 곳들이니 그 원작이 그 원작이고 그 아이템이 그 아이템이다. 그나마 이젠 웹써핑 할 여력도 점점 떨어지는지 마우스 클릭 속도가 떨어지고 추천 원작의 수도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다. 눈빛은 공허하고 기운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의욕충만하던 젊은이가 좌절하는 모습을 보기가 안스러워 특별히 일 거리를 하나 만들어줬다. 현재 진행 중인 작품 캐스팅을 위한 연기자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을 해 보는 게 어떠냐고 메신저로 넌지시 물어봤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은 화들짝 놀라면서 맡겨만 주시면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보겠다며 메신저 대화창에 질문을 입력한 지 0.3초만에 답글이 떴다.


만약 현재 진행 중인 작품이 무사히 투자가 완료된다면 캐스팅을 해야 되는 건 사실이다. 물론 아직 투자가 되지 않았고 투자할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치국부터 마시는 느낌이 없지 않아 들긴 하지만 만약 투자가 된다면 캐스팅을 해야 되니 연기자 데이터베이스 같은 게 있어 한 눈에 쭉 훝어보며 연기자들을 고를 수 있다면 적절한 캐스팅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적어도 어떤 배우들이 있는지 몰라서 그때 그때 생각나는 배우들 아무나 캐스팅해야되는 상황은 피할 수 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은 지금 맡겨주신 연기자 데이터베이스 구축 업무가 영화사에 들어와서 한 일 중에 가장 영화사 직원이 하는 일 같다는 소감을 밝힌 후 네이버로 배우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해 왔던 원작 소설 추천이나 시나리오 모니터 같은 일들은 아무나 해도 되는 일 같아서 재미가 없었는데 캐스팅 준비 작업을 하니 이제야 영화사에서 일하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내 생각엔 캐스팅 준비를 위한 연기자 데이터베이스 작업도 아무나 해도 되는 일인 것 같은데 뭐가 다른 지 모르겠다. 실제로 네이버에서 원작 소설들을 검색하다 보면 어떤 블로그에선 어떤 소설이나 만화의 아무개 역할엔 누구가 어울린다며 친절하게 배우 사진까지 올려둔 가상 캐스팅 포스트가 뜨기도 한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이제부터 하려는 일이 영화사 직원이 아닌 블로거가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진 않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늦게 깨달았으면 좋겠다.


가끔 영화사들 놀러다니다 보면 현재 그 영화사에서 진행 중인 작품에 출연해주길 바라는 배우들 사진을 극중 이름과 함께 검고 두꺼운 종이판에 이쁘게 오려 붙여 벽에 걸어놓은 걸 흔히 봐왔는데 실제 그대로 캐스팅 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데 성공해서 극장에서 상영하는 경우도 거의 못 봤다. 남들이 바보라는 게 아니고 나도 한때는 누구보다 열심히 배우들의 사진을 이쁘게 오려 붙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어서 지금도 왠만한 CF 연출부 보단 잘 오려붙일 자신이 있다.) 영화가 들어갈 지 말지는 아무도 모르니 일단은 열심히 하는 수 밖에...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수백여명 혹은 천여명이 넘을 지도 모르는 연기자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을 무사히 마치면 현재 진행 중이긴 하지만 투자는 아직 안된 작품의 가상 캐스팅 작업을 시켜볼 예정이다.

Posted by 애드맨

얼마 전부터 대표에게 줄기차게 한번 만들어보자고 들이미는 아이템이 있는데 대표는 잘 모르겠다고 하고 다수는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다고 하고 소수는 정말 재밌으니 딴 회사 가서라도 만들어보라고 한다.

가 구상한 아이템이라서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주제의식도 분명하고 메시지도 있고 지나칠 정도로 상업적이고 드라마틱하고 볼 거리도 많아서 99퍼센트의 확률로 대박이 터질 것만 같아 이 아이템의 가능성을 몰라보는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영화를 하겠다고 인정사정없는 영화판에서 버티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인데 그렇다고 내 돈으로 전액 투자하라면 그럴 능력도 안 되고 그럴 수 있다 해도 1프로의 확률로 망해버리면 어떡하나 싶어 역시 망설여진다.


인생을 걸고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상대적으로 돈이 별로 들지 않는 시나리오 단계까지는 혼자서 진행을 했지만 메인 투자가 안되서 결국 패밀리 펀드나 프렌드 펀드의 투자로 만들어진 몇 편의 독립(?) 장편 영화들을 알고 있는데 자기 돈 들여서 영화를 만들 때야 스텝들에게 감독님 피디님 소리도 듣고 가끔씩 언론 잡지 등에 독점 영화 자본이 지배하는 한국 영화계에서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뉘앙스의 인터뷰도 실리고 해서 뿌듯하고 보람도 있긴 한데 막상 촬영 다 하고 프린트 떠서 극장에 걸면 3일 이상 상영하기 힘들고 간판 내리고 나면 남는 건 빚 뿐이다. 정말 운이 좋은 경우엔 극히 희박한 확률로 해외 영화제 구경도 다녀올 수 있지만 갔다와봤자 딱히 남는 것도 없으면서 해외 영화제 체류 기간만큼의 이자만큼은 확실하게 불어나 있다.


위와 같은 경우를 한 두번 봐 온 게 아니어서 기본적으로 메인 투자가 안되는 영화는 무리해서 만들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국내 최고의 배급, 투자, 제작사에서 국내 최고의 톱스타 두 명을 캐스팅해서 만든 영화도 쪽박을 차는 마당에 내 아이템을 영화로 만들면 그 영화보단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 것 같아 미련을 버리기가 힘들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로 만들어지기만 하면 대박이 터질 것만 같고 꼭 영화로 만들어서 이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평가절하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주고 싶다는 욕망이 부글부글 끓긴 하지만 혼자만 좋아서 무리해서 영화를 만들었다가 빚더미에 올라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빚 갚느라 고생하고 계신 분들을 생각하면 역시 숙연한 기분에 알아서 자제가 된다. 그 사람들이라고 바보라서 그런 게 아니고 만나서 얘기해보면 다들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인데 그래도 안되는 사람은 안 되니 흥행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작년 개봉작 열편 중 아홉편이 쪽박을 차는 가운데 내 아이템은 아홉편의 쪽박찬 영화 대열에도 못 끼었으니 나는 쪽박조차 못차는 바보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쪽박차는 영화를 만들자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장한 적은 없으니 바보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소수지만 내 아이템이 재밌으니 딴 회사 가서라도 만들어보라는 의견이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아서 주변인들에게 모니터를 돌려봤는데 비슷한 대답들이 돌아와서 얌전히 있기로 했다.

대표 말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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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중인 작품의 제목이 구리다는 의견이 많아서 제목 바꾸기 회의를 했다. 다들 내가 생각해도 이거보단 나은 제목을 지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 했었지만 막상 멍석 깔아주고 대안을 제시해보라고 하자 정작 나오는 대안들은 누가 생각해도 원래 제목보다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점심 먹고 나서 시작한 회의가 저녁 때까지 이어지고 결국은 야심한 밤이 됐지만 모두가 만족할 만한 이렇다 할 제목은 나오지 않았다. 한 사람이 최소 네 다섯 가지의 제목안을 제시했고 토탈 백여개가 넘는 제목들이 나왔지만 원래 제목보다 낫다는 생각이 드는 제목은 서너개가 넘지 않았다.


밤이 점점 깊어지고 버스 끊길 시간이 되자 다들 지쳤는지 이 정도면 됐다 싶어 최종 후보안을 간추려서 대표에게 전화로 알려줬더니 원래 제목이 낫다고 하신다. 몇날 몇일 동안 생각했던 아이디어들은 결국 쓰레기통으로 직행했고 그냥 집에 가긴 좀 허탈하다고 생각한 직원들 몇명이 모여 모여 술을 한 잔 했다. 술이 좀 들어가니 회의 때 차마 못 했던 얘기들이 하나 둘 씩 나왔는데 아무개 직원의 무슨 무슨 제목은 우리끼리 생각해도 좀 너무한 것 같다, 최종 후보로 채택된 제목 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보다 나은 게 없어 차마 반대는 못했다, 아무개 직원이랑 아무개 인턴이랑 사귀는 거 같다, 직원이 아깝다, 인턴이 아깝다 등등...


예전부터 느꼈던 건데 나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사람막고 길막고 감독한테 욕먹으며 고함지르고 뛰어다니는 건 별로 재미를 못 느꼈지만 따뜻한 사무실에서 노가리까며 탁상공론하는 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언쟁이 시작되고 감정이 고조되고 가끔 얼굴도 붉히긴 하지만 회의가 끝난 후 가까운 술집에 가서 허심탄회하게 잡담하는 시간이 촬영 끝내고 홀로 택시타고 집에 가는 시간보다 정겹고 좋고 그런다.


적당히 술에 취해서 집에 가는 차에 앉아 창 밖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영화 따윈 만들어져도 그만 안 만들어져도 그만이고 뭔 영화가 대박이 나든 쪽박을 차든 나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배아파하지 말아야겠다는 너그러운 마음도 든다. 제목 회의를 하다 보면 최근 히트친 영화의 패러디스러운 제목 안들이 많이 제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패러디 제목 짓기의 달인인 에로 비디오 업계 사람들은 요즘 다들 뭐 하고 있는걸까?


우리 회사에서 진행 중인 작품의 제목이 쿨하다고는 할 수 없고 구리다면 구리긴 한데 감독님은 정말 좋은 분 같다. 막상 촬영이 시작되고 나면 꼬장을 부리기야 하겠지만 길고 긴 고난과 인고의 세월을 보낸 우리 감독님이 꼭 현장에서 레디 액션을 외치는 장면을 목격하고 싶다. 방금 전까지 같이 술을 마셨던 우리 직원들과는 회사가 망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더라도 서로 싫어하지 말고 메신저 차단 삭제 하지 말고 좋은 관계 오래 오래 지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역시 술이 좀 들어가고 나니 그 동안 몸 담았던 망해버린 영화사들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 둘 씩 떠오르며 안부가 궁금해지는데 특히나 지인들에게 한푼 두푼 꿔 간 후 잠적한 아무개 언니의 사람 좋은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지는 밤이다.

p.s. 누가 추격자 욕 좀 시원하게 했으면 좋겠다. 나도 좋게봤지만 다들 죽인다고 하니 짜증날라 그런다;;

Posted by 애드맨

무명의 작가지망생으로 오랜 시간을 어둠 속에서 살아온 친구 하나가 얼마 전 영화 제작 경험이 전무한 신생영화사로부터 각색 의뢰를 받았다. 비록 오리지날 시나리오를 사겠다는 제안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각색 작업도 일은 일이니 계약서를 쓰고 계좌번호도 알려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영화사에 찾아갔다. 친구에게 각색 작업을 의뢰한 신생 영화사 대표는 계약서를 작성하기엔 서로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고 돈을 먼저 줬다가 수준 미달의 작품을 써 오는 사기꾼 같은 작가 지망생들한테 많이 당했기 때문에 일단은 한번 써와보라고 제안한다.


친구는 무명의 작가지망생으로 일다운 일도 못해보고 살아온 세월이 지겨웠고 일단 써와보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가봤자 또 다시 이어질 별볼일 없는 혼자만의 일상이 두렵기도 하고 어쩌면 이대로 스크린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일단 한번 열심히 써보겠다고 대답한다. 혼자 방에서 영화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친구의 대답을 들은 신생 영화사 대표는 역시 아무개 작가님은 열정이 있어서 크게 될 거라며 열심히 써 오라고 말로만 격려해준다.


얼떨결에 일단 한번 써와보겠다고 약속한 친구는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어쩌면 열심히는 했지만 최선을 다하진 않았기 때문에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는 거라고 자학을 해 본다. 잘 쓰지도 못하는 주제에 돈 얘기부터 하기가 부끄럽기도 하다. 만약에 정말 시나리오에 재능이 있었다면 벌써 자신의 이름이 개허접 쓰레기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라도 올랐겠지만 자신의 이름을 스크린에서 목격한 경험이 전무하니 아직은 돈 얘기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 한번만큼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열심히 노력해서 각색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다시 쪽방에 틀어박혀 추격자 같이 누가 봐도 죽이는 스릴러 한편을 써서 자신을 무시했던 세상에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망상에 빠져든다.


친구의 얘기를 들은 나는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하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는지 겪을 만큼 겪어 본 주제에 또 그러기로 했냐며 친구의 노력을 비웃어주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비웃고 나니 친구도 허탈하게 바보처럼 웃는다. 차마 우리가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안 풀리는 거라는 말은 못한다. 아마 친구도 나에게까지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을 것이다.


이번 각색 작업을 니 인생의 마지막 각색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누가 봐도 끝내준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각색해보라고 격려해주며 만약 너도 나도 이 모양 이 꼴로 계속 안 풀리고 찌질하게 살게 되면 그냥 우리가 직접 영화사를 차려서 작가 카페 같은 곳에 작가 모집한다는 글을 남긴 다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영화사를 찾아오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몇 다리 걸쳐서 아는 유명 감독이나 제작자 혹은 투자사 대표와 친하다고 구라를 쳐서 뭐라도 있는 것처럼 보인 후 마치 큰 은혜라도 베풀 듯이 시나리오 한번 써와 보라고 제안하자고 의기투합했다.


만약 작가 지망생이 일단 한번 써본 시나리오에서 돈 냄새가 난다면 몇 다리 걸쳐서 아는 유명 감독이나 제작자들에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돌려보고 예상대로 형편없는 시나리오를 써 오면 이딴 시나리오로는 영화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가르침을 주면 되지 않겠냐고 치밀하게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여기까지 신이 나서 얘기를 하다보니 친구가 괴물로 보였다. 친구도 내가 괴물로 보였겠지.

상수는 사람 되긴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고 했지만 어째 사람보다는 괴물이 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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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들의 불신이 시작됐다.


우리끼리 이 좁은 사무실에서 서로 지지고 볶고 해 봤자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대학교 갓 졸업하고 백지 상태에서 회사에 처음 왔을 때야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대학교 중간고사 리포트 내듯 뭐든지 열심히 했지만 대충 다녀보고 나니 예전에 꿈꾸던 생활과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루트를 통해 회사에 대한 뒷담화도 듣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영화들이 대박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고 아무리 여기 저기 뒤져봐도 회사에 돈이 들어오는 구멍이 안 보인다. 이러면 점점 회사에 대한 회의가 들 수 밖에 없다.


나는 아이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 한 친구는 다른 사람 몰래 가끔씩 잡코리아를 들여다보는데 슬슬 다른 회사를 알아보고 있는 것 같고 또 다른 친구는 지금 이 생활이 그리 싫지는 않은지 웹써핑과 메신저에 열중하며 현재를 즐기고 있다. 집에서 이어폰까지 가져와서 음악 감상에도 열심히다. 아마 아침에 일어나서 집에서 나와 갈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하는 것 같다. 어떤 친구는 회사가 집 같은지 회사 컴퓨터를 개인 컴퓨터 사용하듯 하는데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왠지 연륜이 느껴진다. 남들이 뭘하든 전혀 신경쓰지 않고 언제나 느긋하고 별로 아쉬운 것도 없어 보인다. 나이가 제일 많은 친구는 여기서 물러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뭔가 한껀 해보려고 하루 종일 열심히 뭔가 쓰고 읽고 뒤적거리고 이거 괜찮지 않냐며 나에게 물어본다. 의욕이 대단한데 좀 귀찮다.


자연스럽게 원작 추천 회의는 시들해졌다. 초반에는 각자의 기획안에 시키지도 않은 SWOT 분석까지 해가며 자신이 추천한 원작의 강점, 약점, 기회, 위협 등을 일목요연하게 경쟁적으로 프리젠테이션 해댔지만 이제는 A4용지의 반페이지에 원작 아이템의 제목과 네이버에서 검색한 간략한 줄거리만 첨부해서 SWOT 프리젠테이션은 커녕 그냥 이거 재밌지 않냐고 툭 던지고 끝이다. 예전에는 자신들의 기획안을 누군가 별로 재미없다고 말하면 이게 왜 재밌는지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곤 했지만 이젠 아님 말고다. 점심 시간 후엔 다들 조금씩 졸기 시작했다.


사실 이게 정상이다. 우리 회사가 메이저 영화사도 아닌데 한꺼번에 여러 작품을 진행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게다가 현재 진행하는 작품도 잘 안되고 있는 마당에 원작 추천을 해봤자 별 수 있겠냐는 것이다. 당연히 별 수 없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너는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고 싶겠지..^^;;

이건 절대 우리 회사 얘긴 아닌데 어떤 회사의 대표는 인건비를 전혀 지출하지 않고 회사를 운영한다는 소문이 있다. 직원을 고용은 하지만 돈은 주지 않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꿈만으로 버티던 직원이 기다리다 지쳐 알아서 회사를 관두면 또 다른 직원을 고용하고 돈은 주지 않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 회사에 공짜 직원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들에게 뭔가 시켜야 된다는 고민은 안 한다. 다들 알아서 창의적으로 잘 놀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 직원들도 이러고 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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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와의 구정연휴 영화 흥행 순위 알아맞히기 돈 내기에서 졌다. 연휴가 끝나자 아무개가 내기에서 졌으니 약속한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길래 지금은 돈이 없으니 나중에 주겠다고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아무개는 씁쓸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갔고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왜 바로 돈을 안 주냐며 무언의 항의라도 하는 듯 얼굴이 잔뜩 굳어있다.


구정 연휴 전 아무개가 모 영화의 1등에 베팅하길래 미쳤거나 모자란 줄 알았는데 아무개가 이기고 내가 질 줄은 몰랐다. 그때만해도 얼씨구나 돈 벌었다 싶어 신나게 내기를 하고 각서 비슷한 것도 쓰고 재밌었는데 이렇게 참담한 결과가 나오고 나니 배가 아파서 차마 돈까지 바로 주진 못하겠다. 각서에는 돈을 준다고는 써있지만 언제까지 준다는 말은 써 있지 않으니 일을 대충 처리한 아무개에게도 잘못이 있다.


풀이 죽어 있는 아무개를 보고 있으려니 안된 마음이 들어 개봉 영화 흥행 순위 내기는 매주 할 예정이니 다음주 내기 때 한꺼번에 계산해주겠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얼굴이 좀 풀린다. 계속 이길 줄 아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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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의 시나리오 회의를 했다.


시나리오는 6년 전에 완성됐고 크랭크인 날짜도 몇 번 잡혔었다는데 결정적인 순간마다 투자가 무산되고 제작사가 도산하고 출연하기로 했던 스타급 배우가 변심하는 바람에 서너곳의 영화사에서 2고 3고 4고...12고...의 각색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온 작품이다. 몇일 전까지만 해도 우리 영화사에서 제작하게 될 지도 모르는 작품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미 제작하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각색 기간이 6년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다.


6년 동안 이미 서너곳의 영화사를 옮겨가며 각색을 해왔기 때문에 시나리오 회의를 한다고 딱히 새로운 대안이 나올 것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하고 있을 순 없으니 내부 모니터 결과를 종합해서 시나리오 회의를 했다. 장르적으로 공식처럼 정확한 기획 영화여서 개인적으로는 이렇다 할 불만도 없고 고쳤으면 하는 부분도 없는데 감독, 피디와 함께 시나리오 회의를 해야 하니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왔다.


어찌됐건 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이니 제작이 성사되지 못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시나리오 회의를 통해 그 이유를 밝혀내서 각색 방향을 제작 가능하게 새로 잡아줘야 한다지만 보통 이 정도 단계까지 오게 되면 더 이상의 유의미한 각색은 불가능하다.


예상대로 감독은 시나리오에 대해 어떤 얘기가 나오든 예전에 다른 영화사에 있을 때 한번씩 들었던 얘기고 그렇게 안해 본 건 아닌데 별로여서 이렇게 썼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그도 그럴것이 6년이면 1년에 한편씩만 써도 6편의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시간이니 6년 동안 서너곳의 영화사를 거치며 수십명의 기획팀 마케팅팀 제작팀 직원들과 각색 회의를 했으면 영화사 직원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대안이 연도별로 한번씩은 다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각색 단계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의 기획 단계에서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A급 스타 배우가 이 시나리오에 꽂혀서 노개런티에 자기 돈까지 투자해서 출연하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한 각색 회의를 6년이 아니라 10년을 해도 변하는 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독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듣고 있던 모 인턴은 당돌하게도 그럼 이렇게 이렇게 고치면 될텐데 왜 그렇게 안 고치냐며 노골적으로 답답해했다. 아니나 다를까 감독은 그렇게도 고쳐봤는데 반응이 그리 좋지 않았고 자신의 의도와도 다르다고 말해주었다. 잠시 당황한 모 인턴은 갑자기 화를 내며 그럼 요렇게 저렇게 고치면 되지 않냐고 말을 이어가려고 했는데 감독이 어이없어 하려고 하자 나이가 지긋한 피디가 능숙하게 모 인턴의 말을 끊고 화제를 바꿔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회의가 끝나고 술자리에서 나이 지긋한 피디는 감독이 예민한 편이라 혈기왕성한 인턴들과의 회의는 부담스러우니 앞으로는 안했으면 좋겠다고 하길래 앞으로는 이럴 일 없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대표는 지금 시나리오가 어느 배우에게 가 있는지에 대해서만 궁금해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6년 동안 각 연도별 A급 배우들에게 한번씩은 시나리오가 다 갔었다고 한다.

Posted by 애드맨

재작년부터 영화를 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씩 이 바닥을 떠나고 있다.


집에 돈이 많은 친구는 강남 한복판에 조그맣게 삼겹살 집을 차렸고 영어를 잘하는 친구와 토론을 잘하는 친구는 영어학원과 논술학원에 취업했고 넉살이 좋은 친구들은 세일즈 업계로 진출했다. 물론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친구도 있다. 다들 일단은 돈 때문에 다른 일을 하게 됐지만 조만간 돈을 많이 벌어서 다시 영화계로 돌아오겠다고는 하는데 그런 말을 남기고 영화판을 떠난 선배들 중에 다시 영화계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학원으로 간 친구는 수년간 영화계 언저리를 떠돌며 남들 들러리만 서고 제대로 영화를 한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돌아오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말을 남겼는데 지금은 아이들을 가르치며 수년간 영화일을 하면서 번 돈을 몇 달 만에 벌어들이고 있다. 유명 강사들과 비교하면 그리 많이 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던 지난 날을 생각하며 상대적으로 무척이나 행복해하고 있다.


삼겹살 집을 차린 친구는 경쟁이 너무 치열해 생각보다 장사가 안되서 빨리 때려치고 영화를 하고 싶다지만 지금도 꿋꿋하게 카운터 앞을 지키고 있다. 내성적인 성격인데도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제약회사에 취업한 친구는 적성에 맞지 않는 일하느라 심적 고통이 컸는지 정신과의 도움을 받으면서 오늘도 열심히 약국 문을 두드리고 있다.


과연 영화를 한다는 건 뭘까?


감독이나 주연 배우가 아니라 현장에서 슬레이트를 치는 것도 영화일이고 혼자 방에서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것도 영화일이고 영화 판권을 판매하는 일도 영화일이긴 한데 이 모든 일들을 다 같은 영화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조금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영화를 말하는 사람은 인종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마찬가지로 무슨 영화가 만들어지든 상관없이 영화 제작 현장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는 아직 모르지만 어찌됐건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도 무척이나 다르다.


영화판을 일찍 떠나는 친구들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거나 영화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만 쇼맨쉽(?)이 부족하거나 자존심이 지나치게 강한 친구들인데 영화계에 처음 입문해서 이런 저런 잡일들을 하며 분위기를 파악하고 기회를 노리다가 어느 날 문득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굳이 아쉬운 소리 해가며 힘들게 영화를 만들어 남에게 보여주고 평가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다들 열심히 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재능 하나만은 많은 친구들이었는데 이 날 이때까지 안되면 죽을 때까지 안되는 거라며 다른 일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무리 뭐 같다고 욕먹고 흥행이 안되는 영화를 만들었어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욕이라도 먹어 본 사람들이 그저 부러울 뿐이지만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한 사람은 그리 부럽지 않다.

Posted by 애드맨
 

인턴들과 원작 추천회의를 하다보면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하던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회의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나는 이 소설이 좋은데 배우는 누가 해줬으면 좋겠고 감독은 이 사람이 딱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허물없이 나누다보면 조만간 영화 한편 뚝닥 만들어서 개봉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원작 소설이나 만화를 한편씩 추천한 뒤 대강의 줄거리를 소개하고 왜 흥행이 잘 될 것 같은지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것만으로 회사에서 돈을 주고 점심도 먹여준다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얼마나 영화 감상문을 잘 썼는지를 기준으로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공정한 심사를 통해 선발된 인턴들이 만들기만 하면 대박이라는 원작 소설들을 일주일에 서너편씩 추천하고 있으니 영화사 입장에선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 만들기만 하면 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인턴들이 추천하는 모든 원작들을 다 영화로 만들 순 없으니 그 중에서 제일 재미있고 흥행도 잘 될 것 같은 원작 하나를 선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다 보면 분위기가 제법 살벌해질 때도 있다. 모두들 자기가 추천한 원작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엄청 열심히 토론하는데 20대 중초반 여성 인턴의 한마디면 대부분의 회의가 정리가 된다. 아무리 심드렁한 원작 소설이더라도 20대 중초반의 그녀가 한마디하면 관심이 생기고 이거 정말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원작이라도 비호감 요소가 많아 자기 또래의 여자들이 싫어할거라고 한마디하면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로 돌변한다.


나뿐만 아니라 인턴 중에서는 아무도 20대 중초반 여성 인턴의 취향을 이기지 못한다. 영화든 소설이든 무조건 예뻐야 여자들이 보고 싶어 한다고 해도 아무도 반론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녀는 영화 관련 학과를 나온 것도 아니어서 강력한 티켓 파워를 가졌고 알려진 20대 중초반 일반 여성 관객 그 자체이니 그녀가 싫다면 영화로 만들면 안된다.


그녀와는 달리 박찬욱 감독을 좋아하는데 리틀 미스 선샤인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맨 처음 이 얘기를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리틀 미스 선샤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 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 인턴의 취향은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가 추천하는 원작 소설들이 덜 유명하기도 하고 한결같이 사회의 더럽고 추악하고 어두운 면을 다룬 것들이어서 특히 여자인턴들에게 언제나 절대적인 외면을 받고 있다. 나름 영화 공부도 많이 한 것 같고 심지도 굳어보여서 혼자서 시나리오를 쓰거나 연출부의 길을 걷는게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왜 마케팅실 직원같은 영화사 인턴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언제 기회가 되면 조용히 불러내서 물어보고 싶다.


원작 추천 회의 초창기엔 해리포터 급의 초베스트셀러들이 추천됐는데 모두가 알만한 초베스트셀러급의 원작 소설들은 이미 판권이 팔렸거나 우리 영화사에서는 판권을 사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나니 이제는 다들 추천할만한 원작이 별로 없다고 난리다.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 인턴은 도저히 재미있는 원작 발굴을 못하겠다고 자기가 직접 썼다는 오리지날 시놉시스를 제출했는데 모두들 돌려보고 별로 재미없다고 간만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조금 상처받은 듯 했다.


다음부터 본인이 쓴 오리지날 시놉시스는 추천하지 말라고 메신저로 말해주었다.

Posted by 애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