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들 중 일부와 송년회를 가졌다.


약속장소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워낙 오랜만의 만남이라 무슨 말부터 해야 되나 고민이 좀 됐지만 막상 만나보니 실없는 농담 하는 것부터 옷 입는 스타일까지 다들 옛날 그대로여서 엊그제 만나고 오늘 다시 만난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주된 화제는 전 망해가는 영화사에 다니던 시절의 에피스드들이었는데 이미 다 지난 일들이라 당시엔 심각하게 느꼈던 일들도 우습게만 느껴졌고 조금은 그립기까지 했다.


각자 그동안 쌓아 두었던 이야기 꺼리들을 다 풀어놓고 나니 화제는 자연스럽게 대표님의 근황으로 옮겨갔다. 다들 대표님과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는 아닌 관계로 대표님의 근황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저 카더라 통신과 설들만 난무할 뿐이었다. 누군가는 대표님 목소리가 듣고 싶다며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들며 전화를 거는 척 했지만 대표님 전화번호를 까먹었다며 다시 슬그머니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누군가가 대표님 전화번호를 불러주었지만 누군가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들지 않았다. 다른 바닥은 몰라도 이 바닥에서만큼은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니지만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었다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으니) 어쩐지 잘 지내고 계실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냥 그렇게 믿기로 했다.


전 망해가는 영화사에 다니던 시절에 느꼈던 영화계 체감경기는 지금의 체감경기와 비교하면 화창한 해변가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나날과도 같은데 나를 그 화창한 해변가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신 분이 바로 대표님이다. 당시엔 이런 저런 사소한 불평불만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대표님이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물론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으므로 마냥 나와 같은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전철이 끊길 시간이 됐지만 지금 이 멤버들이 다시 같은 영화사에 다니며 점심엔 어느 식당에 갈 것인지 토론하게 될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았고 그렇다고 지금 이 멤버 그대로 다시 술자리를 갖게 될 날도 그리 금방 오지는 않을 것 같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문득 미모의 마케팅 팀장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졌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안부 문자 정도는 큰 무례가 아닌 것 같아 심혈을 기울여 안부 메시지를 작성했는데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도저히 용기가 생기지 않아 그냥 포기해버렸다.


요즘도 가끔은 만약 전 망해가는 영화사가 대표님의 계획대로 한국 최고의 메이저 영화사로 성장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곤 한다. 만약 그랬다면 나도 덕분에 좀 잘 나가고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만약 내가 한국 최고의 메이저 영화사에서 바쁘게 일하며 한참 잘 나가는 중이었다면 애드맨도 앤잇굿 블로그도 없었을 것이다.


근데 좀 잘 나간다는 게 어떤 건지 이젠 상상이 되질 않는다. 언젠가 한번쯤은 꼭 경험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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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이다. 2007년 마지막 날의 반나절을 최홍만과 효도르의 경기를 기다리며 텔레비전 앞에서 보내고 나니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다. 경기를 기다리는 도중에 간간이 핸드폰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안부 문자가 몇 통 왔는데 단체 문자로 의심되는 번호에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문자 몇 통을 받고나니 어쩐지 나도 안부 문자를 보내야되는게 아닐까 고민이 되서 잠깐 네이트온에 접속해 새해 복 어쩌구 문자를 입력하다가 그냥 귀찮아서 컴퓨터 꺼버리고 이종격투기 경기를 마저 보다가 2008년을 맞이했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보니 비단 작년 뿐만 아니라 한 해가 갈때마다 길가다 우연히 만나면 껄끄러울 것 같은 사람들 리스트가 늘어간다는 <애드맨의 법칙>을 발견했다. 왜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만나면 껄끄러울 것 같은 사람들만 점점 늘어가고 만나면 반가울 것 같은 사람들은 줄어드는지 잠깐 고민해봤는데 이게 다 내가 못난 탓이었다.


만나면 껄끄러운 사람들 대부분은 안 좋게 헤어졌거나 안 좋은 일은 없었지만 인연이 지속되는 동안 좋은 일이 없었던 경우인데 작년에는 안 좋게 헤어진 사람들도 많았고 안 좋은 일이 없더라도 인연이 지속되는 동안 좋은 일이 없었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니뭐니 해도 한때 충성을 다짐했던 영화사에서 경영상 해고당했던 일인데 당시엔 몰랐지만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비공식업무일지를 쭉 한번 훝어보니 제법 트라우마가 컸던 것 같다. 파란만장했던 망해가는 영화사에서의 추억들도 이제는 그저 스쳐지나갔던 수많은 영화사에서의 추억들 중 하나일 뿐이라 더이상 특별할 것도 없지만 블로그에 연재까지 하고나니 유난히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비록 해고는 당했지만 인간관계까지 소원해진 건 다소 아쉬운데 망한 영화의 스텝들이 그렇듯이 망한 회사의 직원들도 아무런 껀수 없이 따로 연락해서 만나거나 안부전화라도 자주하기가 쉽지가 않다. 사랑하는 할머니에게도 살다보면 연락을 자주 못드리게 되는데 그저 같은 회사에 잠깐 같이 다녔을 뿐인 동료 직원들은 소원할 수 밖에 없다.


나만 빼고 다른 직원들끼린 자주 연락하고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닌지 걱정은 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안그래도 직원 한명이 얼마 전에 송년회를 주최하려고 했었는데 다들 그날은 약속이 있어 힘들다는 이유로 무산되고 말았다.


나는 참석하려고 했는데 막상 참석하려고 생각하니 분위기가 영 편하지는 않을 것 같아 일이 생겨서 힘들겠다고 문자를 날렸는데 나 뿐만 아니라 다들 일 때문에 힘들다고 해서 송년회는 취소라는 답장이 왔다. 다들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나보다.


올해는 해고당하고도 인간관계 유지하기는 바라지도 않고 다만 길가다 우연히 만나면 껄끄러울 것 같은 사람들 수만이라도 좀 줄여봐야겠다.

Posted by 애드맨

나의 사무실 책상 서랍 속에는 미처 뿌리지 못한 명함들이 고이 모셔져 있다.


입사 당시에 회사에서 명함을 총 네통 받았는데 세통은 아직 뚜껑도 안 열어봤다. 맨 처음 명함을 받고나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명함을 돌리고 간간히 새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명함을 돌리고 업무 관계상 진짜 필요해서 명함을 돌리고도 남아서 일가 친척 가족들에게까지 명함을 돌렸는데도 아직 세통이 남았다.


회사가 잘 나가던 시절에는 명함을 신나게 뿌리고 다녔는데 회사가 망해가는게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서는 누굴 새로 만나도 굳이 명함을 꺼내 건네는 수고를 하지 않았더니 어느새 이렇게 명함이 산더미처럼 쌓여버렸다. 생각해보니 언젠가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명함을 받는 횟수도 많이 줄어든 것 같다. 할 일도 없는 영화 업종 불황과 영화업계 종사자들 명함 거래 횟수의 상관관계에 대해 조사해볼까?


친구에게 책상 속에 쌓여있는 명함을 볼 때마다 인맥도 없고 무능해보여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다고 했더니 나이트에 가서 부킹할때 뿌리거나 길거리에서 맘에 드는 사람 만날 때마다 한 장씩 줘 버리라고 하던데 회사가 망하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다.


집에도 회사 이름만 다른 내 명함들이 대여섯통 더 있는데 푸짐하게 쌓여있는 명함을 볼때마다 명함을 처음 받았을 때의 의기양양하던 기분과 더 이상 그 명함에 적힌 단체 소속이 아니게 될 때의 씁쓸했던 기분이 되살아나 가슴이 아파온다. 독한 맘 먹고 확 불태워 버리려고도 했는데 그래도 미우니 고우니 내 이름 세 글자가 적힌 명함이어서 차마 버리진 못하고 간직해오다보니 어느새 내 책상 속엔 명함으로 만들어진 산더미가 자리를 잡게 됐다.


나에게 명함을 건넬 때의 예절을 가르쳐 준 영화사는 더 이상 영화사 고유의 영업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 내가 다니던 시절 뿐만 아니라 회사가 생긴 이후 한번도 수익을 낸 적이 없는 그 영화사는 내가 나갈 때쯤엔 사무실도 부동산에 내놨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알고 지낸 감독 중 한 명은 하얀 종이에 자기 이름과 전화번호만 달랑 적힌 명함을 직접 만들어서 나눠주고 다녔는데 비록 그가 만든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그가 만든 명함만큼은 심플하고 실용적이라 보는 사람들마다 잘 만들었다고 칭찬했던 기억이 난다.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 신분으로 할 소린 아니지만 영화사에서 명함을 디자인할 때 회사 이름을 명함 귀퉁이에 조그맣게 인쇄해서 회사는 망하더라도 회사 이름이 적힌 귀퉁이를 잘라내고 재활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해주면 좋겠다.


아껴야 잘 산다는 명목으로 사무실 형광등 절전 캠페인이 시작됐다.


사무실에 형광등 몇 개 안 켠다고, 고용된 청소부 아주머니를 해고하고 우리가 학교 다닐 때처럼 당번을 정해서 돌아가며 사무실 청소를 한다고 해도 망해가던 회사가 살아나진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분위기지만 다들 일단 올해는 어떻게든 넘겨보자는 생각인 것 같다.

Posted by 애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