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누가 먼저 만드느냐가 중요한 것이라지만...
 

시나리오를 구하진 못했고 시나리오를 읽어본 사람을 수소문해서 대략의 줄거리를 들어봤는데 다행히 하나도 안 똑같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많이 다르다. 다른 건 다 똑같아도 그거랑 그거만 다르길 빌었는데 그거랑 그거는 당연히 다르고 다른 것들도 많이 다르다. 내가 맨 처음 그 아이템을 구상했을 때 절대로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던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하고 있더라. 내가 가지 않은 길을 갔기 때문에 투자도 되고 캐스팅도 되고 등등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길로 가면 만드는 사람이나 돈 댄 사람 모두에게 그리 좋은 결과가 나오진 않을 것 같아 조금 걱정된다. 내가 지금 남의 영화 흥행 성적을 걱정할 때는 아니고 중요한 건 내 프로젝트에도 언젠가 좋은 날이 올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신나면서도 조금 부끄럽다. 다음부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희일비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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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아이템은 누가 먼저 생각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먼저 만드느냐가 중요한 것이라지만 비슷한 아이템을 구상하고 최선을 다해 추진했는데 결과적으로 나는 안 되고 ‘누구’는 되면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왜 나는 안 됐는데 ‘누구’는 됐을까? 를 곰곰이 생각하다보면 내가 ‘누구’보다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굴 원망하는 건 아니다. 나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의기투합해서 최선을 다 해봤기 때문이다. 어쩌면 될 수 있던 순간도 여러 번 있었는데도 안 됐으니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밖에. 그 정도까지 했는데도 안 된 거면 나랑 그 아이템은 인연이 안 닿는 것일 지도 모른다. 후회도 미련도 아쉬움도 없다. 어차피 영화 한 편 만들고 말 것도 아니고 비슷한 줄 알았는데 안 비슷할 수도 있는 거니까 일단은 빨리 시나리오나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다른 거 다 똑같아도 그거랑 그거만 다르면 괜찮은거다. 망하길 바랄 수도 없고 잘되길 바랄 수도 없는게 망하면 내가 했어도 망했을 가능성이 크니 내 안목이 의심받을테고 잘 되면 그냥 배아플 것 같고. 그나마 날씨가 화창해서 다행이다. 낮에 햇볕을 많이 쬐면 기분을 좋게 하는 세로토닌이 많이 분비될 뿐만 아니라 숙면을 도와주는 멜라토닌을 만드는 데도 유리하다고 한다. 해지기 전에 나가서 햇볕이나 많이 쬐다 집에 가야겠다. 오늘까지만 이러고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내일부턴 진짜 열심히 살꺼다.

Posted by 애드맨

회사에 들이밀었다 퇴짜 맞은 아이템을 사장시키기 아까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는 피디나 작가들에게 들이밀었다가 또 퇴짜 맞았다. 내 아이템을 왜 몰라주냐고 항의하자 회사에선 어떻게든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는 했지만 차마 공개적으로는 못하고 은밀히 들이밀었다가 퇴짜 맞은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만약 다른 회사에서 내 아이템을 좋아해서 계약하자고 하면 우리 회사와 어떤 식으로 공동 제작을 이끌어내야 하나 어쩌나 걱정도 했지만 이젠 괜한 걱정이 뭔지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 이게 뭐가 재밌는지 모르겠다며 퇴짜 놨을 땐 이 세상 어딘가에는 반드시 나의 아이템을 알아보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수많은 사람에게 모니터를 돌려본 결과 영화사에서 아이템을 선정하는 기준은 놀라우리만큼 비슷해 한번 퇴짜 맞은 아이템을 누군가 발견해줄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록 이 영화사에선 퇴짜 맞았지만 내 아이템과 궁합이 맞는 영화사가 어딘가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은 쪽팔림의 지름길이다. 영화를 발견하는 일은 정성일 평론가만이 할 수 있는 것 같다. 나 잘났다고 설치지 말자.


나는 그저 감사히 월급을 받으며 위에서 시키는 일이나 열심히 하며 살아야 될 팔자일지도 모른다. 이럴 땐 그나마 나에게 그동안 월급을 준 대표님이 그렇게 고마우실 수가 없다. 대표님과 나를 뽑아준 윗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든 회사에 붙어있어야겠다.


너무 정확히 주제파악을 해버려 의기소침해지기 전에 네이버에서 내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나의 동명이인 중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아서 가끔씩 그들의 정보를 볼때마다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가는 영화사에 시나리오나 아이템을 들이밀었다가 퇴짜는 맞지 않는 출세한 동명이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내 이름 검색을 완료한 후 검색에 재미가 들려서 안부가 궁금했지만 절대로 먼저 전화하지 않는 영화인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동명이인들 정보만 뜨는 걸로 봐선 현재 딱히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인은 없었다. 좀 더 자세한 검색을 위해 영화인 데이터베이스 검색을 해보니 그나마 그동안 무슨 영화를 하며 살아왔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별 거 없었다. 그 중에는 내 아이템을 퇴짜놓은 영화인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끼리 백날 니가 잘나가네 내가 잘나가네 눈치 싸움을 벌여도 결국 네이버나 다음같은 넓고 넓은 포탈의 세계에선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일 뿐이다. 그냥 소시민일 뿐이다.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다른 직원들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마찬가지였다. 이 작은 회사 안에서는 니가 높네 내가 낮네 위아래가 있지만 회사 밖으로 나가면 모두가 젊은 영화인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비록 월급이 계속 밀리고는 있지만 그나마 월급을 챙겨준 고마운 대표님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역시 훌륭하시다. 몇 년 전 사진이지만 훤칠하니 잘 나왔고 인터뷰 기사도 몇 개 있다. 자랑스럽다. 다만 그때 그시절 사진과 지금 대표의 모습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믿기 힘들 정도로 거리가 있는데 세월 탓일까 영화판 탓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들이밀었다가 퇴짜 맞은 아이템을 다른 회사에 들이밀었다가 퇴짜 맞을 때마다 나중에 꼭 훌륭한 사람이 되서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한다. 도대체 이 정도면 됐지 뭘 더 바라는 건지.


맏언니는 조만간 우리팀끼리 회식 한번 하자는데 무슨 얘기를 하려고 평소 안하던 회식을 하려는걸까?
무섭다.

Posted by 애드맨

나는 우리 대표가 재밌을 것 같다고 건네는 원작 아이템이 도무지 재미가 없다. 그건 나의 직속 상사인 황언니도 마찬가지여서 대표님이 영화계에 대해 잘 모르니 우리가 도와야 된다고 이미 몇달전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런데 나는 우리 기획팀의 대장 황언니가 재밌다고 들이미는 원작 아이템도 도무지 재미가 없다. 그건 우리 기획팀의 대장 바로 밑의 송언니도 마찬가지여서 기획 회의를 할 때마다 이게 더 재밌네 저게 더 재밌네 하며 한바탕 설전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 기획팀은 황언니, 송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세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다른 팀원들이 내가 들이미는 아이템을 재밌다고 하지도 않고 나도 송언니나 황언니가 들이미는 아이템이 시시껄렁하다.


기획 회의 자리가 자존심 싸움도 아닌데 어느 날인가부터 각자의 영화인생을 건 자존심 싸움이 되 버려서 서로가 서로의 아이템을 깍아내리고 자기의 아이템이 최고라고 울부짖는 자리가 됐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누군가 영화화에 가장 적절한 대박 아이템을 추천하면 모두가 감동한 다음 그 감동의 힘으로 으쌰으쌰 영화화를 위해 밀어붙이는 경운데 그러기가 사실 쉽지 않고 누구의 아이템이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인지 절대 답이 나오지 않을 토론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감정 싸움이 되버리곤 한다. 이런 과정을 몇 달 거쳐서인지 황언니와 송언니는 은근히 사이가 좋지 않게 되버렸다. 만약 내가 없다면 두 사람은 같이 밥도 안 먹을 분위기다.


오늘 열린 기획회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건진 대박 아이템이 없다는 것을 서로 확인한 후 그동안 진행 중인 작품 점검을 하다가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황언니가 재밌을 것 같다고 구매한 시나리오를 송언니가 다른 영화사에 팔아버리라고 강력하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송언니의 회사 자금 사정도 안좋은데 그 시나리오 다른 영화사에 팔아버리면 안되겠냐는 발언을 들은 황언니는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총천연색으로 변하더니 니가 영화에 대해 뭘 아냐부터 시작해서 서로의 영화 인생을 건 한바탕 설전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사실 그 작품으로 말할 거 같으면 공모전에서 수상은 했다만 연출하고 싶어하는 감독도 없고 출연하고 싶어하는 배우도 없다. 이미 여러명에게 돌렸고 모두에게 까인 폐기처분 직전의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전부터 모 영화사에서 준비하는 우리 시나리오와 비슷한 컨셉의 시나리오가 캐스팅이 끝났고 크랭크인 날짜까지 잡았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은 황언니는 괜찮다 별 일 있겠냐라고는 했지만 솔직한 생각으로는 그 작품은 송언니 주장대로 다른 회사에 팔든가 엎는 게 맞다.


나는 중간에서 딱히 할말도 없고 해서 아무 말 없이 설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상대로 평소에 불만이었던 일들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한 후 살갑게 화해하며 회의가 마무리 되었다. 물론 진심으로 화해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고 두어시간 회의는 했다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이템 기획 회의를 몇 달 해본 결과 이런 식으로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아이템 회의라는게 뜬구름 잡기랑 비슷해서 도저히 재미가 없을 것 같은 아이템도 이창동이나 박찬욱이 하겠다고 들이밀면 바로 메이드 되는 것이고 제법 괜찮을 것 같은 아이템도 나나 송언니 그리고 황언니가 들이밀면 씨알도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밀양이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같은 시나리오를 신인작가가 만들어보겠다고 투자사에 들이밀었다면 귀싸대기 서너대 맞고 영화사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영화판이 원래 이런 곳이다.


결국 어떤 얘기를 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누가 얘기하는지가 중요한데 우리 기획팀 세명 모두 시장의 신뢰를 얻을만한  검증받은 데이타가 없다. 이래서는 백날 가도 영화 만들기 힘들다. 내가 영화사 사장이라면 기획팀 따윈 거느리지 않을 것이다. 영화 제작이 목표라면 기획팀 일년 운영할 비용으로 A급 감독 한명과 묻지마 계약을 하고 룸싸롱 같은데 열심히 데리고 다니는게 낫다.


그래서 나는 기획회의가 끝나고 예전에 스텝으로 참여했던 망한 영화의 착한 스텝들과 만나 술 한잔 하고 집으로 왔다. 내일은 토요일이다. 만세.

Posted by 애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