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 맘 다 안다. 왜 모르겠는가? 다른 일 하는 친구들하고 만나봤자 연예인 누구 아는 지나 물어보고 촬영장에서 몇 번 봤다고 안다고 말할 순 없으니 딱히 해 줄 이야기는 없고 술 마시며 음담패설이나 나누다 보면 어느새 집에 갈 시간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고 너는 나중에 감독되면 내라 그래서 술값도 안 냈지만 조금 허무하다. 감독 된다고 다 술값 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조금 답답하고 굳이 그런 말 하는 것도 우습고 암튼 남는 게 없다는 느낌이다. 반면 영화하는 친구들하고 만나면 비록 누가 술값을 낼 것인지에 대한 부담이 있긴 하지만 (특히 영화 한 지 1년 이상 지난 멤버들의 모임일 경우) 연예인 누가 아냐고 물어보는 애도 없고 굳이 말 하지 않아도 서로 사정 다 알고 있으니 부연 설명 필요없고 어쩌면 뭔가 금전적으로 도움이 되는 껀수가 생길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들뜨기도 한다. 가끔은 술자리에서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는 게 사실이고 처음 보는 영화인이라도 알아두면 이 바닥 좁으니 언젠간 금전적으로 도움이 되는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자꾸 영화하는 친구들하고만 어울리게 되고 다른 일 하는 친구들과의 모임은 연례 행사가 되는 경향이 생긴다.

그러면 안 된다. 특히 작가는 그러면 안 된다. 영화하는 친구들끼리 모여봤자 “작품 언제 들어가?”, “계약했어?”, “투자됐어?”, “캐스팅은?” 솔직히 이 네 마디가 대화의 대부분이다. 영화 얘기도 안 한다. 은행원들이 모이면 예술 얘기하고 예술가들이 모이면 돈 얘기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맨날 영화판 얘기만 쓸 것도 아니고 작가로 오래 살아남으려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세계를 겪고 알아야 되는데 영화하는 친구들하고만 어울렸다간 점점 시야가 좁아질 수 밖에 없다. 다른 일 하는 친구의 지인들과도 어울리며 홍상수 영화 얘기 꺼냈다가 소외감도 느껴보고 심형래 욕하다가 멱살도 잡혀봐야 관객에 대한 이해도가 더 깊고 풍부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결코 쉽진 않다. 어렸을 때야 두어번 만나도 금방 친구가 되지만 머리가 좀 크고 나면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술자리가 맨날 있는 것도 아니고 맨날 같이 술 마신다고 친해지는 것도 아니고 친하다고 정말 친한 것도 아니고 일 때문에 자주 만난다 해도 일 끝나면 관계도 끝나는 게 대부분이다.

영화하는 친구들하고만 어울리지 말고 폭넓은 인간 관계도 결코 쉽진 않다면 어쩌라는 건가? 혼자 놀라는 건가? 아니다. 가족들과 어울리라는 거다. 가족들 중에서도 이왕이면 엄마하고 노는 게 좋다. 효도도 할 수 있고 일에도 큰 도움이 된다. 최근 몇 년 간 대중문화의 대세가 바로 엄마기 때문이다. 조만간 개봉하는 마마부터 시작해서 마더, 애자, 엄마, 친정 엄마, 열 한 번째 엄마, 엄마는 창녀다, 인어 공주,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경축 우리 사랑 등등. 당장 기억나는 한국 영화만 해도 이 정도고 외국 영화 중에서도 엄마 이야기가 많고 제목에 엄마가 들어가지 않더라도 엄마의 비중이 큰 영화들이 엄청 많다. 조만간 대박이 예정되어 있는 써니도 강형철 감독이 우연히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 한 장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하고 한국 소설 최초로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엄마를 부탁해도 엄마 이야기다. 영화나 소설 뿐만 아니다. TV 드라마는 99% 엄마(시어머니) 이야기다. 최신 유행에 뒤쳐지지 않겠다고 굳이 트렌드세터들을 기웃거릴 필요 없다. 영감을 얻겠다고 막 해외 여행가고 집 떠나서 고생할 필요 없다. 가족들과 어울리면 다 해결된다. 가족들 중에서도 이왕이면 엄마랑 자주 대화를 나누고 엄마가 재밌어 하는 걸 유심히 관찰하고 효도도 해라. 영화하는 친구들하고만 어울리지 마라.

관련 포스팅
시나리오 이렇겐 쓰지 마라 

Posted by 애드맨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전철과 버스는 끊겼지만 택시비를 아껴보겠다고 한시간 넘게 집으로 걸어오고 있는데 버스 정류장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처음보는 미모의 아가씨 한명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갓길에는 그녀의 차로 보이는 인피니티 한대가 서있었다. 인피니티를 타는 미모의 아가씨의 존재는 심야 새벽길을 홀로 걷는 남자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누구시길래 무슨 일로 저런 럭셔리한 미모의 아가씨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고함을 지르며 통화를 하는걸까 궁금했지만 늦은 시간이기도 하고 괜히 구경하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관심없는 척 느린 발걸음으로 내 갈길을 가고 있었다. 인피니티는 짙게 선팅되어 있어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는데 어쩐지 그 안에는 남자가 한 명 타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너 지금 어디야. 왜 전화 안 받어. 자꾸 거짓말할래?>등의 대사가 하이톤으로 들려오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이성과의 통화 같았다. 상대방이 아가씨의 전화를 피하고 있기 때문에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것으로 짐작됐는데 내가 옆으로 지나갈 때쯤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해! 안들려?>라는 대사가 들려왔다. 전화가 끊긴 것이다. 아가씨는 쾅하는 소리와 함께 수화기를 내려놓았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중전화 주변엔 나외엔 아무도 없었다. 잠시 둘러보더니 고함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얼굴 표정으로 어리버리한 인상의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솔직히 무서웠다.


아무리 미모의 아가씨라도 인적이 드문 새벽길에서 무서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으면 반가울 리가 없다. 이쁜 아가씨 뒤엔 남자가 있기 마련이어서 지금 저 차안에는 나보다 덩치 크고 싸움도 잘하는 남자가 타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언제 무서운 얼굴로 소리를 질렀냐는 듯 3월의 햇살 같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성큼 성큼 다가왔다.


길거리에서 사탕이 포장된 안마 전단지 나눠주는 여대생(?) 말고는 나에게 이렇게 과감하게 다가오는 아가씨는 겪은 적이 없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뒷걸음질을 치는데 그녀는 간드러진 눈웃음과 애교섞인 목소리로 <죄송한데요. 핸드폰 좀 빌려주실래요?>라 말하며 섬섬옥수같은 손을 고압적으로 내밀었다.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나를 보고 핸드폰만 빌려주면 뭐라도 빼줄듯한 미소를 날리는 처음보는 아가씨에게 핸드폰을 빌려줄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과 빌려주지 않았을 때 포기해야할 가능성이 정신없이 머리 속에서 교차했다. 가까이서 보니 인피니티 안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 이 야심한 밤거리는 보기와는 다르게 과감한 그녀와 나 우리 둘만의 거리였다.


처음보는 남자에게 거침없이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말할 수 있는 대담함과 이 여자가 나에게 한눈에 반했나 싶은 착각에 아무 말 없이 통화료가 한달 연체중인 핸드폰을 기꺼이 꺼내주었다. 인피니티를 타고 다닐 정도의 여자가 핸드폰 통화료 아끼겠다고 남의 핸드폰을 빌릴 것 같진 않았고 그녀와는 달리 내차는 커녕 통화료도 한달 연체중인 내가 돕지 않으면 안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려니 했다.


겨우 핸드폰 하나 빌려준 걸로 생색내긴 싫었지만 혹시나 핸드폰을 빌려준 대가로 집에까지 태워다 주겠다면 어쩌나 내 핸드폰에 자기 번호를 알아서 저장해버리면 어쩌나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였다. 그녀는 거침없이 폴더를 열더니 다시 무서운 얼굴로 변신한후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리 어린 나이는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어두워서인지 나이를 짐작하기는 힘든 스타일이었다.


<엄마다. 너 오늘 학원 빠졌다며? 엄마한테 자꾸 거짓말하면 아빠한테 이른다. 빨리 안 들어와!! 거기 어디라구? 엄마가 데리러간다니깐!!>


아가씬줄 알았던 그녀는 아들과의 통화를 짧고 굵게 마치고 뻘줌하게 서 있는 나에게 <고마워요.>란 말과 함께 핸드폰을 돌려주고 인피니티를 타고 밤거리로 사라졌다.


그녀가 나를 두고 떠난 이 거리. 내 핸드폰엔 그녀의 아들 전화번호가 찍혀있었다.

Posted by 애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