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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2.09 전직 영화사 직원의 면접 (1)

아는 분이 아는 분의 소개로 굴지의 제작사 대표님과 면접을 보았다.


최고의 역사와 최고의 시청률 그리고 최고의 작가를 자랑하는 제작사지만 기획팀에서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 개발 작가를 고용해서 작품을 만드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전직 기획팀 직원의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기획팀도 없었다. 양복에 넥타이 입고 출퇴근 할 생각을 하니 생각만 해도 가슴 한구석도 답답해왔지만 소개시켜주신 분의 성의를 생각해 양복과 넥타이를 챙겨입고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굴지의 제작사를 찾아갔다.


십여명의 직원들이 정장을 입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벌써부터 숨이 막혀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데스크 직원의 안내로 대표 방으로 들어가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이력서를 건넸다. 다른 루트로 얘기를 들어보니 신입 사원을 뽑는 회사도 아니라는데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킬지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표님은 현장 스텝과 기획팀 직원으로서의 경력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잘하는 외국어가 있는지를 물어보시며 문화 관련 분야의 해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외국어 중에서도 특히 중국어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이셨다. 아는 외국어는 있지만 잘하는 외국어는 없고 중국어는 학교 다닐 때 교양으로 한 학기 들었을 뿐이어서 다 까먹었다고 하니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러면서 예술만 오래 하다보면 숫자에 약해지고 게을러지고 끼리끼리만 놀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나태해지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너무 정확한 지적에 얼굴이 화끈 거렸다. 언젠가부터 숫자에 약해지고 게을러지고 끼리끼리만 어울린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예술이라고 주장하며 흥행 스코어나 제작비 등의 숫자엔 별 관심이 없던 시절이 있었고 영화 기획은 열심히 한다고 되는게 아니라는 생각에 언젠가 영감이 떠오르길 기다리며 한 없이 게으르게 살아왔고 친구를 만나도 영화 하는 친구만 만나왔다. 그나마 숫자와 게으름은 스스로도 문제라고 생각해서 노력으로 극복하려고 했지만 영화하는 친구만 만나는 건 노력해도 잘 개선되지 않았다.


영화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성격이 안 맞아도 대화는 통하고 얘기할 꺼리가 없으면 어느 영화가 들어가네 엎어졌네 누가 계약을 했네 월급을 떼였네 등의 정보 교환만 해도 두어시간 정도는 아무 노력 없이 흥미진진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님은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이런 이런 일을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나의 포부를 들은 대표님은 이쪽 업계 일이 혼자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며 본인이 잘 키워줄테니까 아무 생각없이 시키는 대로 잘 할 자신있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키워준다는 말과 뭘 시키는지는 말도 안해주고 시키는 대로 잘 할 자신있냐고 묻는게 웃겼지만 나이 지긋하신 어른 앞에서 내색은 못하고 그저 열심히 하겠다고만 대답했다. 대표님은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당장은 할 수 없겠지만 꾹 참고 자기가 시키는 다른 일들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하셨다.

월급은 얼마면 되겠냐고 해서 미친 척 하고 전 회사에서 받던 월급의 두 배를 불렀는데 고개를 갸웃하시더니 그 돈으로 괜찮겠냐며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말씀하셨다.


굴지의 제작사 대표님과의 면접을 끝내고 나니 당시엔 몰랐는데 어째 내 길이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갑자기 소주 한잔이 땡겼는데 남자 혼자 공원 벤치에 앉아 소주를 마시는 그림은 과히 좋지 않은 것 같아 맥주 한 캔 원샷하고 집에 왔다.


Posted by 애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