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4.11 어디서 무엇이 되서 다시 만날까 (7)
  2. 2007.12.03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마지막 업무일지 (2)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퇴사했다.


최근 근무 태도를 보아하니 이번 달을 넘기긴 힘들겠다고 예상은 했는데 막상 퇴사한다고 하니 있을 때 좀 더 잘해줄 걸 그랬다는 후회가 조금은 들었다. 그동안 내가 뭘 잘해줬나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딱히 잘 해준 게 없어서 술이라도 한 잔 사야 될 것 같았다.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만 어디서 무엇이 되서 다시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 흥행은 귀신도 모른다지만 사람일이야말로 아무도 모르는 거고 만약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망해가는 영화사 퇴사 후 우여곡절 끝에 아주 아주 거물이 되고 나면 그땐 술을 사주기는커녕 전화 통화조차 못할 수도 있다.


망해가는 영화사를 그만두고 허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로또를 한 장 샀는데 덜컥 당첨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로또 당첨금으로 영화에 투자할 가능성도 없진 않고 그 때가 되면 자기가 힘들고 어려울 때 자기한테 잘해준 사람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 때를 생각해서 지금 미리 술이라도 한 잔 사주면 나중에 설마 모른 척하진 않으리라 믿는다.


솔직히 그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뭔가를 해 보려는 모습이 안쓰럽다가도 어쩔 땐 한심하고 미련해보이기도 했는데 아마 본인에게도 힘들고 답답하고 안쓰러운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다들 말은 번지르르 잘 하는데 실제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설상가상으로 한국 영화계의 절대 불황으로 망해가는 영화사와 비교당하면 화 낼지도 모르는 메이저 영화사마저 위태롭다고 하니 망해가는 영화사의 사정은 굳이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짐작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은 술이 좀 들어가고 나자 그동안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던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조금은 원망스럽다는 듯 왜 옛날에 자기가 추천한 원작 아이템을 무시했냐고 따지듯이 물어왔다. 참고로 얼마 전에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추천했던 원작 아이템을 모 외주 제작사에서 드라마로 제작한다는 기사가 뜬 적이 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은 자기가 하자는 대로만 했으면 우리도 그 외주 제작사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았겠냐며 나를 한심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까놓고 말하면 자기는 작품을 보는 안목만큼은 메이저 외주 프로덕션 수준이지만 망해가는 영화사에 들어온게 실수고 설상가상으로 작품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없는 팀장을 만나서 능력 발휘를 못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이쯤 되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배웠기 때문이다.


나도 옛날에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지금 나에게 하는 원망섞인 한탄을 다른 누군가에게 했던 적이 있다. 그 때 그 분은 나의 한탄을 한참 들으시더니 <설득도 능력이다>라는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해주셨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여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맞다. 설득도 능력이다. 단순히 추천만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누군들 영화를 못 만들겠는가.


그래서 나도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에게 <설득도 능력이다>라고 말 해주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은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멍하게 있다가 지하철 끊길 시간됐다며 일어나겠다고 했다. 이대로 집에 보내기는 조금 미안해서 술집 옆의 편의점에서 커피 우유 한잔을 사주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설득도 능력이라는 말은 괜히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왕 잘해주는 거 끝까지 잘 해주는 건데 성질머리하고는...

Posted by 애드맨

퇴사했다.


퇴사 전 마지막 인사를 위해 오랜만에 사무실에 나가 그동안 정들었던 동료 직원들과 대표님을 만났다. 누구는 퇴사한다고 발표하면 상사가 발목을 붙잡고 사표를 수리해주지도 않고 면담에 면담을 거듭하느라 지치고 마음도 복잡해진다는데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표를 내지 않아도 알아서 퇴사 처리가 되서 마음은 편했다.


출근(?)하자마자 내 옛날 책상에서 얼마 남지 않은 개인짐을 챙긴 후 캐비넷에 랜덤으로 쌓여있던 시나리오와 서류들을 정리했다. 내가 떠나면 누군가의 업무가 늘어날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썩 편친 않았다. 모든 걸 정리하고 사무실에 있던 동료들에게 퇴사 인사를 했다. 다들 힘들고 지친 상태라 누가 누굴 위로하고 배웅해줄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떠나는 사람에게 섭섭하다고 말해주는게 이렇게 고마울 줄은 퇴사해보기 전엔 몰랐었다.


섭섭하다고 말해줄 뿐만 아니라 사무실로 음식들을 배달시켜 조촐하게 송별회도 열어줬는데 맛있게 먹는 척 하느라 목이 메일 뻔했다. 나를 위한 송별회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동료들이 배달시켜준 음식을 먹으며 지난 이야기들을 주고 받다보니 역시 중요한건 마음 하나 뿐이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삼겹살이면 어떻고 중국 요리면 어떠리. 진심이 담긴 떡볶이 하나면 충분하다. 동료 직원들과의 조촐한 송별회를 마치고 대표방에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생각해보니 대표와 5분 이상 이야기를 해본 건 면접 때 이후 처음이었다. 첫 면접 때도 5분을 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5분도 안되는 시간 내내 이력서를 개인 블로그 포스팅처럼쓰는 건 어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꾸중만 들었기 때문에 대화다운 대화는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대표님은 팀장에게 무슨 통보를 받았는지 물어보았고 나는 들은 대로 대답했다. 대표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동안 운영해 온 식으로 기획팀을 돌리는 건 효율적이지 못한 거 같아서 결단을 내렸다며 회사는 그만두더라도 좋은 기획 있으면 언제든지 들고 오라고 했다. 한국 영화계가 불황이고 회사도 어렵긴 하지만 앞으로 다른 회사를 알아보든 프리랜서로 뛰든 영화판에서 살아남으려면 독한 마음 먹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뛰어야 된다며 나이도 나이인 만큼 몇 년 안에 뭔가 세상에 보여주지 못하면 다시는 영화하기 힘들 거라는 걱정도 해 주셨다. 예상대로 밀린 월급과 퇴직금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격려와 조언에 감사드리며 남자답게 악수 한번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방에서 나왔다. 회사가 어려운건 어려운건데 자기 사업체를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보려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팀장은 일이 있어서 얼굴을 볼 순 없었고 넘버투가 대표방에 들어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동안 복도에 서서 동료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는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다들 뭔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넘버투가 대표방에서 나오자마자 우리는 각자 짐을 챙겨 회사에서 나왔고 동료 직원들은 입구까지 나와 떠나는 우리들을 배웅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에게서 우리도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지 모르는 처지에 먼저 떠나는 직원 송별회를 열어주고 배웅까지 하는게 웃긴거 같다는 말이 나왔다. 정작 자기들 배웅해 줄 사람은 없을 거라는 개그가 인상깊었다.


넘버투와 회사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각자 대표와의 마지막 면담 내용에 대해 모니터를 했다. 모니터를 마치고 실업급여 수령 절차에 대해 조언까지 듣고 식당에서 나왔는데 아직도 밖은 훤한 대낮이었다. 밤이거나 깜깜했으면 술이라도 한잔 마셨을텐데 벌건 대낮이고 딱히 더 할 말도 없고 앞으로 안 볼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대낮에 여러 명과 한꺼번에 이별을 하고 이제는 더 이상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도 아니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쓸쓸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기 전에 나 하나 떠나도 아무 지장이 없을 이 거리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으로서는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거라는 감회에 젖어 쭉 한번 둘러보았다. 비록 지금은 불명예 퇴장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나의 꿈을 좌절시켰던 이 거리에 얼마 남지 않은 젊음과 열정으로 시드 머니를 마련해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게임에선 다 털리고 오링나서 빈손으로 집에 가지만 다음 게임에는 꼭 이겨서 살아남고 싶다고 생각하며 힘차게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동안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비공식 업무일지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공식 업무일지를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알아서 퇴사해버리는 엔딩으로 마무리 짓고 싶지는 않았는데 세상 일이 내 맘 같지가 않군요. 뭔가 드라마틱한 엔딩을 기대하셨던 분들에게는 죄송하게 됐습니다.


영화사 기획팀에 처음 입사할 때 만해도 내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무척 행복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일을 추진하며 현실과 부딪히다 보니 닳고 닳기 시작하며 타성에 젖더군요. 이건 영화사의 문제가 아니고 순전히 저 자신의 문제였습니다. 현실과 꿈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아무런 대안 없이 일을 하려다보니 주변 사람들과 상처만 주고 받으며 제대로 되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대표한테 보여줬다가 혼난 이력서가 바로 그동안 영화일을 하며 겪었던 적나라한 실패의 리포트였는데 의도치 않게 또 다시 실패의 리포트를 작성해버렸군요. 부끄럽게도 제대로 해 놓은 일도 없는 주제에 실패의 리포트만 거의 책 한권 분량입니다. 실패의 리포트를 작성하는 그 순간 실패를 패배시킬 수 있고 새로운 도전의지와 새 비전이 창출된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올해도 드디어 12월이 되었습니다.

즐거운 연말 되시고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Posted by 애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