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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5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시나리오 분류법 (1)
  2. 2007.11.30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사주

새해를 맞이해 캐비닛에 차고 넘치는 시나리오들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도서분류 · 관리방법이 급속히 발달했다지만 나는 딱 한 가지 기준으로만 시나리오를 분류하는데 그 기준은 바로 싹수다. 내가 생각하는 싹수란 시나리오의 문학적 완성도나 공모전 수상 가능성 또는 영진위 지원작 선정 여부 따위가 아니라 순전히 영화화 가능성을 뜻한다. 그렇게 일단은 싹수를 기준으로 시나리오를 분류하고 대박 중박 쪽박을 기준으로 최종 분류하는 편이다.


이런 말 하면 좀 건방져 보일 수도 있는데 나는 어떤 시나리오든 대충 처음 몇 페이지만 읽어보면 싹수가 있는 지 없는 지 알 수 있다. 어떤 시나리오가 싹수있는 시나리오인지 정색하고 묻는다면 딱 잘라 대답하기는 힘들지만 대충 처음 몇 페이지만 읽어보면 견적이 나온다. 물론 <봉준호나 김지운> 같은 국가대표급 감독들의 시나리오는 누구라도 당연히 싹수있다는 평가를 내리겠지만 그 외 기타 등등 영화인들의 시나리오는 평가가 갈리는 편이다. 그러나 <봉준호나 김지운> 같은 국가대표급 감독이 집필한 시나리오라도 누가 썼는지 모른 채로 읽는다면 쉽게 싹수 여부를 판단하기가 함들 것이다.


한마디로 어느 무명 작가가 <존경받던 신부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뱀파이어가 된 후 친구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치명적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나 <만주를 배경으로 말타고 총싸움하는 이야기>를 썼다면 당연히 읽어보지도 않고 싹수없는 시나리오로 분류하겠지만 만약 그 시나리오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의 시나리오라면 읽어보지도 않고 싹수있는 시나리오로 분류할 것이라는 얘기다.


작년엔 한국영화계의 불황 탓인지 신상 시나리오 편수가 확 줄어서 시나리오 정리 작업이 재작년에 비해 한결 수월했다. 오래 묵은 싹수없는 시나리오들을 대거 이면지로 재활용했고, 싹수있는 시나리오로 분류했었으나 영화화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시나리오들을 싹수없는 시나리오로 재분류했다. 시나리오 재분류 작업을 끝내고 싹수있는 시나리오로 분류했었으나 아직까지도 영화화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는 시나리오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는데 이렇게 훌륭한 시나리오들이 아직까지도 영화화되지 않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이 바닥엔 팔자라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 캐비닛 안에는 몇 년 전에 싹수있는 시나리오라고 평가했으나 아직까지도 영화화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시나리오들이 총 서 너편 정도 되는데 (마린보이도 그 중 한 편이었다. 마린보이 한 편만 놓고 보면 다소 허술해보일 수도 있지만 한 해에 수백편씩 쏟아져나오는 시나리오들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마린보이는 불후의 명작이나 다름없다.) 이 시나리오들만 생각하면 뭔가 해 보려는 의욕이 생기려다가 말곤 한다. 이렇게 잘 써도 영화화가 안 되는 마당에 더 잘 쓸 자신은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싹수없는 시나리오로 분류했었으나 그 시나리오의 아이디어 제공자가 투자자이거나 제작자인 관계로 결국엔 영화화되어 극장에 걸리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흥행성적과는 상관없이) 나에게도 언젠간 기회가 올 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희망이 생기기도 한다.


내 아이템들은 당연히 싹수있는 시나리오로 분류되어 있다.

2008/12/29   마린보이 기대된다 [7]

Posted by 애드맨

잘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가 투자무산으로 사이가 흐지부지해진 감독님과 사주카페에 갔다.


한때 나의 운명을 알고 싶어서 꽤나 열심히 명리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 몇 달 정도 공부한 후 아무리 공부해도 나의 운명은 알 수 없을 것 같아 중도 포기했는데 그 이후로는 남한테 돈을 주고 점을 본 적은 없다. 명리학에 정통한건 아니고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지만 대충 점장이들이 어떤 식으로 점을 보는 지 알 것 같아 이런 얘기를 돈 주고 듣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감독님은 나에게 저녁을 사주며 투자 유치엔 실패했지만 원래 영화가 다 그런거 아니겠냐며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려올 수도 있으니 희망을 갖자고 격려해 주셨다. 비록 감독님이 격려는 해주셨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 같지가 않아 겉으로만 힘내는 척 하고 속으로는 계속 좌절했는데 감독님은 그런 나의 속마음을 눈치라도 채셨는지 우리의 운명이 궁금하지 않냐며 사주카페에 가자고 제안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남자 둘이서 초저녁부터 술 마시는 것도 한 두번이지 차라리 잘 됐다 싶어 따라가 보았다.


날카로운 인상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아저씨가 감독님의 사주를 봐주었다.


사주를 믿는 건 아니지만 헛소리라도 듣고 기분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저씨는 연습장에 뭔가를 한참을 끄적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는데 혀를 쯧쯧 차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감독님의 직업이 뭐냐고 물어봤다. 감독님은 나름 재치를 발휘해 <알아맞춰보세요~> 라고 어울리지 않는 재롱을 떨었고 점장이 아저씨는 놀랍게도 혹시 연예영화 관련 업종에 종사하지 않냐고 물어왔다.


감독님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이 범상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비슷하게나마 맞춘게 신기해서 그렇다고 했고 아저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짓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점장이 아저씨는 감독님을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더니 지금까지는 아주 잘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최선을 다하면 본전은 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아왔으나 내년부터 향후 7년간은 무슨 일을 해도 쪽박이니 절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집에서 자숙하라고 했다. 나는 뭐 이런 점장이가 다 있나 싶어 당황스러웠데 감독님은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고 사람 좋게 몇 번 웃으시더니 그럼 외국에 나가면 잘 풀리겠냐고 물어봤고 아저씨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안 새냐고 대답했다. 아니 지금부터 7년이면 남자가 한 참 일할 나이인데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게 말이 되냐고 의아해하는 감독님에게 점장이 아저씨는 그냥 팔자가 억쎄게 좋은 여자 만나는 수 밖에 없다는 말만 남기고 나에게 사주 안 볼 거냐고 물어왔다.


피 같은 돈 내고 악담만 들은 감독님의 억울한 표정을 보니 이 아저씨한테 사주를 보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도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각을 알려줬다. 아저씨는 연습장에 또 뭔가를 한참을 적더니 인상을 찌푸리는게 아닌가.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내 팔자는...


.....중략.....


사주카페에서 나온 감독님은 머리가 아파서 술은 못 마시겠다고 미안하다며 집에 가버리셨다. 만약 점장이 아저씨 말대로 감독님이 향후 7년간은 안 풀리는 팔자라면 감독님과 함께 쓰는 시나리오도 최소 7년은 빛을 못 본다는 얘긴데 정말 생각만 해도 암울하다.


감독님을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드리고 집에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한국 영화계는 향후 7년은 힘들 것 같다. 스크린쿼터가 폐지되려나...

사주를 보고나니 작년에 엎어진 오늘의 운세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Posted by 애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