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성공한 영화인의 대명사 격으로 김용화나 천성일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내가 기억하기론 아주 옛날에는 강우석이나 강제규였고 그 다음엔 봉준호나 김지운이었는데 이제는 김용화나 천성일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렇다고 강우석, 강제규, 봉준호, 김지운이 한 물 갔다는 뜻은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들은 성공한 지 너무 오래 되서 넘을 수 없는 벽이거나 먼 하늘의 별 또는 말조차 걸기 어려운 어르신처럼 느껴지는데 반해 김용화나 천성일은 성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상대적으로 가깝고 친근하고 만만하게 느껴진다는 뜻인 것 같다.


그런데 삼연타석 대박 홈런으로 헐리우드까지 넘보는 김용화는 그렇다쳐도 두 작품 연속 대박인 장훈이 아니라 천성일인 이유는 무엇일까? 내 생각엔 브랜드 파워에서 장훈이 천성일에게 조금 밀리기 때문인 듯 하다. <영화는 영화다>, <의형제> 감독도 대단한 성과이긴 하지만 임팩트로만 따지면 <7급 공무원> 각본, 제작, <추노> 작가 크레딧엔 조금 밀리는 감이 있다. <추노> 작가의 차기작이라고 했을 때 느껴지는 임팩트와 <의형제> 감독의 차기작이라고 했을 때 느껴지는 임팩트를 비교해보면 두 사람의 차이점이 뭔지 금방 알 수 있다. 천성일은 언제나 오리지널 아이템이었고 장훈은 언제나 남의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작을 잘 썼다고 차기작까지 잘 쓰란 법은 없지만 전작이 남의 아이템이었던 경우보단 기대되기 마련이다. 남의 아이템을 잘 알아보는 능력이 롱런에는 더 유리할 수 있겠지만 브랜드 파워라는 면에선 당연히 오리지널 아이템으로만 작업해 온 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랑 같이 일했거나 일하는 아무개가 1~2년 뒤에 김용화나 천성일처럼 될 확률은 얼마 정도 될까? 김용화나 천성일의 무명 시절을 증언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필요 충분 조건을 냉정하게 정리해보니 재능, 노력, 운의 삼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거의 로또 당첨 확률에 가까워 보인다. 아무리 당첨 확률이 낮더라도 복권을 사야 당첨될 기회라도 온다고 나랑 같이 일하는 아무개가 일단은 복권을 산다는 마음으로 꾸준히 작품을 써서 1~2년 뒤에 김용화나 천성일처럼 되면 좋겠다.



Posted by 애드맨

도박중독 심작가가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짤렸다구 자살하지 말라며 위로 차원에서 밥을 사주었다. 물론 지금은 출근만 포기한 상태고 자살할 생각은 전혀 없고 내가 지금 위로 받아야 되는 상황이라는 생각도 한 적은 없지만 남이 볼땐 내가 지금 자살하네 마네 할 정도로 동정을 받아야 되는 상황인가 싶어 조금 씁쓸했다.


예전보다 얼굴이 훨씬 좋아진 심작가는 몇 년 간 영화일 하면서 번 돈보다 요 몇일 도박으로 번 돈이 더 많다면서 요즘 슬슬 정부의 도박산업에 대한 단속이 풀리는 중인데 다시 작년 수준으로 풀리면 도박묵시룩 카이지처럼 프로겜블러 생활에 도전하겠다고 야심차게 포부를 밝혔다.


얼마나 찌질거렸으면 영화일 몇 년해서 번돈보다 도박 몇 일해서 번돈이 더 많은지 모르겠다고 껄껄웃는 심작가는 나에게 회사 짤리고 정 할 일 없으면 자기랑 같이 프로겜블러나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그쪽 산업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혀 없어서 곤란하다고 했는데 태어날 때부터 프로겜블러는 없다고 자기 따라다니면서 한번 배워보지 않겠냐는 것이다.


내가 도박해서 밥벌이나 할 수 있겠냐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심작가는 영화해서 밥벌이 할 수 있는 확률과 도박해서 밥벌이 할 수 있는 확률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는데 듣고 보니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주식은 손실이 나면 본전 찾을 때까지 본의 아니게 장기투자라도 할 수 있지만 영화는 부가판권시장도 없어진 마당에 극장에서 간판 내리면 끝이기 때문에 생각해보니 도박과 별반 다를게 없는 것 같다.


심작가는 자기는 빚도 많고 더 이상 무서울 것 없는 막장 인생이라며 밀린 월급을 받아주면 자기한테 얼마 떼주겠냐고 물어왔다. 이 사람이 뭔 짓을 할지 몰라 살짝 두려워서 어떻게 받아낼꺼냐고 물어보자 월급 줄 때까지 회사 앞에서 발가벗고 드러눕겠다는 것이다.


빨간 스프레이로 온 몸에 대표 이름을 새겨놓고 비열한 거리의 조인성처럼 고함지르고 나체로 떼굴 떼굴 굴러다니면 얼마 되지도 않는 돈 쪽팔려서라도 안 줄 리가 없다고 했다. 적어도 네이버 지식인에 밀린월급 받는 방법 물어보고 대표가 자진해서 월급 줄 때까지 기다려서 받아낼 확률보다는 자기가 생떼써서 받아낼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갑자기 심작가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알고 있던 사람 좋고 글 잘 쓰는 심작가가 아닌 것 같았다. 괜히 밥 한번 얻어먹었다가 나중에 수틀리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살짝 걱정도 됐고 이런 사람도 영화판에서 비리비리하게 찌질이 취급을 받는 마당에 내가 영화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건 아닌가 반성도 됐다.


나는 내가 알아서할테니 제발 잊어달라고 했고 심작가는 언제든 생각나면 연락하라고 했다. 소주 한잔을 곁들인 순대국밥 한그릇을 비우기가 무섭게 심작가는 다시 도박하러 갔고 나는 심작가를 도박장 앞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왔다.


간판도 없는 불법 지하 도박장으로 걸어내려가는 심작가의 뒷모습에서 쪽박의 냄새가 났다.

Posted by 애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