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몇 년전에 친구와 공동집필했다가 아무 소득없이 곱게 하드에 저장해둔 시나리오 한편을 현재 잘나가는 영화사 직원인 후배에게 보여주었다. 시대가 변했으니 사람들이 시나리오를 보는 눈도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메신저로 시나리오를 보내고 얼마 뒤 후배가 다소 흥분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이 시나리오 누가 쓴거예요?>


시나리오에 내 이름이 적혀 있으면 정정당당한 모니터에 방해가 될까봐 시나리오를 보내기 전에 작가 이름을 다 지웠는데 다짜고짜 누가 썼는지부터 물어보다니 느낌이 좋지 않았다. 메신저를 오래 하다 보면 글자만 봐도 대충은 글쓴이의 심정을 느낄 수가 있다.


대충 그냥 아는 작가가 쓴건데 입봉도 못한 무명이어서 이름은 말해줘도 모를거라고 하자 그럴줄 알았다고 살다 살다 이렇게 여성비하적인 유머로 점철된 기분 나쁘고 더티한 시나리오는 처음 읽어본다고 불쾌해했다. 자기가 여자여서가 아니라 정말 심하게 짜증나고 시나리오 읽느라 투자한 시간이 아깝다고 억울해했다. 이거 읽느라 칼퇴근도 못했으니 나중에 저녁 한번 사내라고 길길이 날뛰었고 만약 자기네 영화사에 이런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아무도 안 보여주고 바로 이면지로 재활용하고 싶은 수준이라고 총평했다.


그나마 오빠가 보여주는 거니까 끝까지 읽었지 처음 세장 읽고부터는 정말 읽기 싫었다며 왜 이 작품이 쓰레기인지 조목조목 꼬치꼬치 따져가며 가슴을 후벼팠다. 나는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일들이 다 전생의 업보라고 생각하고 글쓴이가 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후배의 혹평을 가슴에 하나하나 새겨두었다. 사실 몇 년 전에 시나리오를 돌릴 때도 다 한번씩 들었던 말이라서 새삼 충격적일건 없지만 세월이 흘르고 세상이 변했지만 사람들이 나와 친구의 시나리오를 보는 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후배의 모니터를 듣는 내 반응이 평소와는 달랐는지 후배는 혹시 이 작품 오빠랑 관계된 작품 아니냐고 물어왔는데 나는 사적인 감정이 배제된 정정당당한 모니터를 듣고 싶다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했고 후배도 나랑 관계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거 같아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내가 몇 년 전에 친구와 함께 공동으로 쓴 작품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후배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내가 예전에 그 시나리오 비슷한 내용의 시나리오를 친구와 쓰고 있다고 얘기해 준 기억이 나서 중간 부분을 읽을 때쯤 이 시나리오가 나랑 관계있는 시나리오라는 걸 눈치는 챘는데 직접 쓰기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고 놀라는 척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 같아 나는 시나리오의 줄거리 정도만 구상했고 실제 집필은 거의 내 친구가 했다고 얘기해주었다. 후배는 그제서야 그럴 줄 알았다고 오빠는 이런 시나리오 쓸 사람이 아니라며 이제 그만 퇴근한다고 로그아웃해버렸다.


친구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고 팔아버리고 나니 조금 찝찝했다.


이제 강해져야할 때다.

Posted by 애드맨

평소 친하게 지내는 후배1이 여름 한철 죽도록 고생해 단편영화를 만들어서 2007 서울독립영화제에 출품을 했는데 본선 상영작 명단에 오르지도 못했다며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지만 당장 내가 연체 직전의 금융 위기 상태라 오늘은 힘들고 올해가 가기 전에는 꼭 한잔 사겠다고 했다.


서울독립영화제 본선 상영작 명단에 오르지 못한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술까지 사달라는지 그 허무한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게임, 일드, 미드같은 취미생활에 몇 일만 올인해도 금방 잊을 수 있는 고통이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위로해주었다.


후배1이 단편 영화를 사랑하는 건 알겠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진짜로 만들고 싶은 건 연예인 스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장편상업영화고 단편영화는 장편상업영화 감독이 되기 위한 디딤돌 같은 존재일 것이다. 결국 후배1에게 서울독립영화제는 장편상업영화를 만들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만든 단편영화를 충무로 제작자들과 피디들에게 선전하기 위한 그리 효과적이지 않은 홍보 수단일 뿐이다.


게다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수백명의 장편 상업 영화 감독 중 서울독립영화제 출신 감독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고 직접 서울독립영화제에 가서 보면 알겠지만 이것이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에 선정될만한 수준의 단편영화라고 할 만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사평에 이런 저런 의미를 갖다붙여도 어차피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 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상영작 선정 기준은 심사위원이 해마다 바뀌듯 다를 수 밖에 없고 서울독립영화제 사람들도 사람이다 보니 단골 손님은 있게 마련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 심정으로 선정되는 영화들도 몇편은 있을테니 그들의 눈에 들지 못했다는 이유로 허무해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 영화의 유통 배급망이 현실적으로 영화제 말고는 없기 때문에 서울독립영화제나 미쟝센 단편영화제 상영작에 선정되지 못하면 죽도록 고생해서 만든 영화를 스텝들과 가족들끼리만 보고 외장 하드 깊숙한 곳에 고이 간직해야 된다는 사실은 무척 허무할 수 밖에 없다. 간혹 인터넷에 UCC처럼 올린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기적같은 일이니 일반화 할 수는 없다.

독립영화를 만드는건 예술의 영역이지만 영화제 상영과 배급은 비즈니스의 영역이므로 언제까지고 독야청청 인디펜던트일 수 없다는 사실을 독립영화 기획 단계부터 고려해야되는데 영화제 심사위원의 취향을 고려해가며 만드는 영화가 독립영화일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런데 독립영화 만들어서 성공하려면 영화제 심사위원 뿐만 아니라 영화진흥위원회의 독립 영화 지원금을 배분하는 심사위원의 취향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그렇게 뻣뻣하게 독립적으로 사고하면 독립영화 제대로 해먹기 힘들다.


독립영화 만들어서 서울독립영화제 본선 상영작에 선정되는게 영화 인생의 목표라면 더 이상 할말은 없지만 어차피 남의 눈치를 보며 영화를 만들어야 되는 팔자라면 몇 안되는 심사위원에게 잘 보일 생각일랑 잊어버리고 일반 대중에게 잘 보여 한 푼이라도 더 삥뜯을 궁리를 하는게 발전적이고 생산적인 자세아닐까.

Posted by 애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