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시나리오를 한번 써 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한글 프로그램을 열고 빈문서를 보자마자 한 숨이 나왔다.


오리지날 창작 시나리오도 아니고 내가 창작해낸 번뜩이는 기본 설정 하나로 밀어붙이는 우라까이 짜깁기 시나리오여서 금방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빈문서1를 띄우고 글자를 입력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무리 막장 쌈마이 시나리오라도 6~70장을 글자로 채우려면 2박 3일은 걸리는데 그동안 게임도 못하고 TV도 못 보고 놀러 다니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창작 의욕이 사그라든다. 과거 내가 쓴 시나리오들이 제대로 빛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는 자격지심에 키보드에 손가락조차 안 올라간다.

그래서 얼마 전에 신생 영화사로부터 무보수로 일단 한번 써와보라는 각색 의뢰를 거절한 후 자택에서 칩거 중인 작가 지망생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구상 중인 아이템이 하나 있는데 집에서 마냥 노느니 투자하는 셈 치고 한번 써 볼 생각 없냐고 물어보았다.


우리가 그냥 남도 아니고 어두운 시절을 함께 하고 있는 돈독한 사이니까 이럴 때 일수록 서로 도와 나중에 둘 중 하나라도 잘 되면 잘 나가는 넘이 못 나가는 넘을 끌어 주는 밝은 미래를 설계해보자고 제안하니 계약금은 안 줘도 좋으니까 최소한의 진행비만 달라고 한다. 진행비를 받고 쓰면 순수한 의미의 투자가 아니지만 굳이 달라면 주겠는데 얼마면 되겠냐고 물어보자 아무리 적어도 좋으니 자기도 한번 돈이란 걸 받아보고 뭔가를 써보고 싶을 뿐이란다.


친구에게 구글의 공동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그리고 회장 겸 CEO인 에릭 슈미트의 연봉이 1달러였다는 얘기를 해주며 우리도 구글처럼 시작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하니 금액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러겠다고 했다. 친구는 돈이란 걸 받아보고 시나리오를 써 보는 경험이 어떤 건지 너무 궁금하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자기가 쓴 시나리오가 영화화되서 올해 안으로 극장에 걸린다는 보장만 있다면 돈 따위는 안 받아도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친구의 계좌번호를 받아적은 후 바로 빈문서를 닫고 은행 홈페이지에 들어가 구글의 회장 겸 CEO가 받았던 연봉 1달러보다는 많은 금액을 친구의 계좌로 보내주었다.


사기는 거래에 있어서 신의를 배반하고 거짓말로 속여서 재물 등의 이익을 취하는 행위, 재산 상의 신뢰침탈 행위를 말하고 사기죄의 요건으로서의 기망은 널리 재산상의 거래관계에 있어서 서로 지켜야 할 신의와 성실의 의무를 저버리는 모든 적극적 및 소극적 행위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착오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피해자는 사기꾼을 믿다가 속고, 사기꾼은 피해자의 신뢰를 이용해 속인다는데 어째 남의 얘기 같지가 않지만 우리는 암울한 시절을 함께 하고 있는 오랜 친구 사이니까 나중에 잘 안되더라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옛날엔 내가 술도 많이 샀다.


친구와의 신뢰를 이용한 거래를 마치는 순간 이 바닥에서 사기를 치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뜻이고 누가 뭐라건 독한 마음 먹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기회가 온다고 조언해준 선배가 생각났다. 선배의 소식을 들은지 너무 오래됐길래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근황이 궁금해서 생각난 김에 전화를 해 보니 핸드폰이 꺼져있다. 선배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보통은 카드 빚 독촉 때문에 핸드폰을 꺼두니까 연락할 일 있으면 문자를 이용하라고 했던 기억이 나서 안부 문자를 보냈는데 아직 답장은 없다.

선배는 잘 버티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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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넘버 투이자 진정한 실세인 마케팅 팀장에게 야심차게 들이밀었던 원작 아이템을 퇴짜 맞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런 마이너스럽고 천박하고 여성 비하적인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않을 것이고 기적적으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대박은 커녕 쪽박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누가 보고 싶어할 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며 추격자도 성공하는 마당에 와이낫이냐고 묻는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굳이 진행하고 싶다면 망해가기 직전의 우리 영화사 말고 돈도 많고 여유도 있는 영화사에 가라고 했다. 그나마 내 얼굴 봐서 끝까지 읽어봤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보여줬다면 읽지도 않았을 거라고 덧붙였다.


나는 기획서를 보면 알겠지만 굳이 극장 흥행이 안 되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루트를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대안들을 마련해두었고 어쩌면 보너스로 흥행이 잘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잘 좀 봐달라고 했지만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흥행이 잘 될 것 같냐고 물어보길래 딱히 할 말이 없어 농담삼아 직감이라고 대답했더니 피식 웃으며 다른 루트를 통한 수익의 가능성도 짐작일 뿐이니 고려 사항이 아니고 흥행이 잘 될지도 모른다는 나의 직감은 적중률이 낮아서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끼리 재미삼아 하는 개봉영화 흥행예상의 적중률이나 높여보라며 내가 건넨 기획서는 안 본 걸로 하겠다는 말과 함께 고이 접어 돌려주었다.

내가 기획한 작품이 무사히 메이드가 되고 제법 괜찮은 흥행 성적까지 올렸다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텐데 단지 신뢰할만한 경력이 없고 내가 들이민 원작 아이템이 흥행이 잘 될 수도 있다는 직감을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반론을 할 수 없는 현실이 한심하기만 했다. 다행히 회의실엔 마케팅 팀장과 나 둘 뿐이었길래 망정이지 인턴들이 우리 둘의 대화 내용을 들었더라면 엄청 쪽팔릴 뻔했다.


이대로 물러나긴 억울해 뭐라고 토를 달고 싶어도 마케팅 팀장이 나보다 영화 경력도 많고 나이도 많고 학벌도 좋고 상당한 미모를 바탕으로 한 영화계의 인맥도 넓어서 도저히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참여한 작품 수로 기싸움을 벌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하다. 연출부나 제작부 혹은 기획팀 직원으로 작품 제작에 참여해 한 편을 끝내려면 최소 반년에서 일년은 걸리지만 마케팅 업계에서 반년 정도 일하면 최소 서너 작품은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케팅 팀장만 오케이해준다면 대표에게도 마케팅 팀장이 괜찮게 봤다는 말과 함께 자신있게 들이밀 수 있을텐데 같은 사무실 사람조차 설득을 못 시켰으니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진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로서 마케팅 팀장을 내 편으로 만들고 대표를 설득시켜 회사에 남은 돈을 몰빵해 원작 판권을 구매한 다음 A급 작가에게 각색을 맡기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마케팅 팀장이 안된다면 대표도 안된다고 할테니 작품 진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원작 판권 구매도 물 건너갔다.


원작 판권 구매가 어렵다고 아이템을 포기하기는 싫고 그렇다고 표절을 할 수는 없으니 일단은 나 혼자 우라까이라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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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의 2008년 각색 버전 시나리오가 나왔다.


어딜 고쳤는지는 알겠는데 그거 몇 군데 고쳤다고 6년째 못 들어가던 작품이 들어가게 될 것 같진 않았다. 자체 모니터 결과 문제점이라고 지적되었던 부분은 여전히 변함없고 감독님이 특별히 신경써서 고친 걸로 보이는 부분은 왜 고쳤는지 의도를 잘 모르겠다. 내가 삐딱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나보다 작품 경력이 훨씬 많은 마케팅 팀장도 시나리오 회의 내내 이게 뭐가 재밌다는지 모르겠다는 못 마땅한 표정이었다. 


감독님이 아무리 영화를 오래 전에 시작했더라도 작품 경력은 마케팅 팀장이 훨씬 많고 결정적으로 초대박 작품의 마케팅에도 참여한 적이 있기 때문에 말빨은 훨씬 강력하다. 대표님도 언제나 마케팅 팀장의 의견을 듣고 뭔가를 결정하는 분위기고 무엇보다 나이트클럽이나 길거리에서 만났다면 쉽게 말 걸기 힘들 정도의 상당한 미인이기 때문에 무슨 얘기를 해도 다 맞는 말처럼 들린다. 한마디로 실세이자 넘버 투인 셈인데 그런 마케팅 팀장이 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의 2008년 각색 버전 시나리오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1년 더 각색해야 될 것 같다.


마케팅 팀장은 요즘 관객들 취향이 아니라서 마케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은 전부 수정해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하고 일이 있어 죄송하다며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감독은 마케팅 팀장이 나가자마자 길게 한숨을 쉬었고 시나리오 회의 내내 대표님이 참석하지 않는 회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피디는 대표님이랑 얘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 통화가 안된다며 사무실엔 언제 나오시냐고 물어보았다. 그리고 우리끼리 얘긴데 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은 여성 관객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마케팅 팀장의 말대로 작품을 수정하긴 곤란하다며 옛날에 친하게 지냈던 매니저를 통해 어느 A급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넣어둔 상태고 만약 그 A급 배우가 하겠다고만 하면 또 다른 A급 배우도 캐스팅할 자신이 있으니 일단은 시나리오 각색 방향은 감독에게 맡겨두는 게 좋겠다고 대표님에게 전달해달라고 했다.


6년째 각색중인 작품의 시나리오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 오자 영화사 알바 경험이 있는 모 인턴이 6년째 각색 중인 작품의 씬별 등장인물 감정선과 호감도를 그래프와 도표로 만들어서 메신저로 보내주었다. 이게 바로 예전에 박정우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기획실 직원인가 뭔가 하는 것들은 무슨 논문이라도 쓰듯이 그래프까지 그려가면서 시나리오의 문제점 적발에 최선을 다하고 자빠졌고’의 바로 그 논문처럼 쓰여진 그래프였다. 그래프가 컬러플하길래 프린트 잉크가 아까웠지만 일단은 수고했다고 칭찬은 해줬는데 감독에게 보여줬다간 개뿔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 사무실 나와서 할 일 없으니까 시나리오 문제점 적발에 최선을 다하고 자빠졌고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내 컴퓨터 속의 기타 폴더에 곱게 저장해두었다.


6년째 각색중인 감독님은 시나리오 회의가 끝났으니 오랜만에 회포도 풀겸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했는데 다들 바쁘다고 몸을 사리는 분위기여서 나도 일이 있어 죄송하다며 일찍 사무실에서 나왔다. 감독님의 섭섭해하는 얼굴을 보니 조금 미안했는데 나도 이젠 늙고 지쳐서 술도 잘 안 받고 심적으로 여유가 없다. 감독님은 본인이 봉준호나 김지운처럼 잘나가는 유명 감독이라면 이런 홀대는 받지 않을텐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술자리에 참석한다고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껀수 없는 맹목적인 술자리는 집에 갈 때 허탈할 뿐이다. 나도 요즘 힘들다. 감독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마 감독님이 봉준호나 김지운이라면 전직원이 술자리에 참석했을 것이고 대표님도 회의에 참석했을 것이다. 상상하면 마음만 아프니 여기까지.


가장 나이가 많은 인턴이 추천했던 원작 아이템을 간단하게 정리해봤는데 대표는 만나기 힘드니 일단 마케팅 팀장님에게 보여줘봐야겠다.


Posted by 애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