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에 해당되는 글 78건

  1. 2008.01.01 전직 영화사 직원의 해고당하고 인간관계 유지하기
  2. 2007.12.09 전직 영화사 직원의 면접 (1)
  3. 2007.12.03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마지막 업무일지 (2)
  4. 2007.12.02 영화사, 감독, 시나리오의 조합과 크랭크인 가능성의 상관관계
  5. 2007.12.02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한번쯤 우연히
  6. 2007.11.30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사주
  7. 2007.11.28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작가미팅
  8. 2007.11.28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깐죽 (2)
  9. 2007.11.26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서류전형에서 탈락
  10. 2007.11.26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처음처럼 (1)
  11. 2007.11.25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한맺힌 엔딩 크레딧 (1)
  12. 2007.11.24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조촐한 송별회 (1)
  13. 2007.11.23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투자 무산 (2)
  14. 2007.11.22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불길한 예감 (1)
  15. 2007.11.22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굴욕 (2)
  16. 2007.11.22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보은
  17. 2007.11.20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블로그 중독 (9)
  18. 2007.11.20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대책회의
  19. 2007.11.20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손익분기점
  20. 2007.11.19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냉정과 열정 (1)
  21. 2007.11.17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흥행예상 (2)
  22. 2007.11.16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혹평
  23. 2007.11.15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재택근무
  24. 2007.11.14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확률 (1)
  25. 2007.11.12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출근포기 (1)
  26. 2007.11.11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스카웃 제의 (1)
  27. 2007.11.10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내부고발
  28. 2007.11.09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원링스팸 (1)
  29. 2007.11.09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조언
  30. 2007.11.08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옷차림 (1)

2008년이다. 2007년 마지막 날의 반나절을 최홍만과 효도르의 경기를 기다리며 텔레비전 앞에서 보내고 나니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다. 경기를 기다리는 도중에 간간이 핸드폰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안부 문자가 몇 통 왔는데 단체 문자로 의심되는 번호에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문자 몇 통을 받고나니 어쩐지 나도 안부 문자를 보내야되는게 아닐까 고민이 되서 잠깐 네이트온에 접속해 새해 복 어쩌구 문자를 입력하다가 그냥 귀찮아서 컴퓨터 꺼버리고 이종격투기 경기를 마저 보다가 2008년을 맞이했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보니 비단 작년 뿐만 아니라 한 해가 갈때마다 길가다 우연히 만나면 껄끄러울 것 같은 사람들 리스트가 늘어간다는 <애드맨의 법칙>을 발견했다. 왜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만나면 껄끄러울 것 같은 사람들만 점점 늘어가고 만나면 반가울 것 같은 사람들은 줄어드는지 잠깐 고민해봤는데 이게 다 내가 못난 탓이었다.


만나면 껄끄러운 사람들 대부분은 안 좋게 헤어졌거나 안 좋은 일은 없었지만 인연이 지속되는 동안 좋은 일이 없었던 경우인데 작년에는 안 좋게 헤어진 사람들도 많았고 안 좋은 일이 없더라도 인연이 지속되는 동안 좋은 일이 없었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니뭐니 해도 한때 충성을 다짐했던 영화사에서 경영상 해고당했던 일인데 당시엔 몰랐지만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비공식업무일지를 쭉 한번 훝어보니 제법 트라우마가 컸던 것 같다. 파란만장했던 망해가는 영화사에서의 추억들도 이제는 그저 스쳐지나갔던 수많은 영화사에서의 추억들 중 하나일 뿐이라 더이상 특별할 것도 없지만 블로그에 연재까지 하고나니 유난히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비록 해고는 당했지만 인간관계까지 소원해진 건 다소 아쉬운데 망한 영화의 스텝들이 그렇듯이 망한 회사의 직원들도 아무런 껀수 없이 따로 연락해서 만나거나 안부전화라도 자주하기가 쉽지가 않다. 사랑하는 할머니에게도 살다보면 연락을 자주 못드리게 되는데 그저 같은 회사에 잠깐 같이 다녔을 뿐인 동료 직원들은 소원할 수 밖에 없다.


나만 빼고 다른 직원들끼린 자주 연락하고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닌지 걱정은 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안그래도 직원 한명이 얼마 전에 송년회를 주최하려고 했었는데 다들 그날은 약속이 있어 힘들다는 이유로 무산되고 말았다.


나는 참석하려고 했는데 막상 참석하려고 생각하니 분위기가 영 편하지는 않을 것 같아 일이 생겨서 힘들겠다고 문자를 날렸는데 나 뿐만 아니라 다들 일 때문에 힘들다고 해서 송년회는 취소라는 답장이 왔다. 다들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나보다.


올해는 해고당하고도 인간관계 유지하기는 바라지도 않고 다만 길가다 우연히 만나면 껄끄러울 것 같은 사람들 수만이라도 좀 줄여봐야겠다.

Posted by 애드맨

아는 분이 아는 분의 소개로 굴지의 제작사 대표님과 면접을 보았다.


최고의 역사와 최고의 시청률 그리고 최고의 작가를 자랑하는 제작사지만 기획팀에서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 개발 작가를 고용해서 작품을 만드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전직 기획팀 직원의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기획팀도 없었다. 양복에 넥타이 입고 출퇴근 할 생각을 하니 생각만 해도 가슴 한구석도 답답해왔지만 소개시켜주신 분의 성의를 생각해 양복과 넥타이를 챙겨입고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굴지의 제작사를 찾아갔다.


십여명의 직원들이 정장을 입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벌써부터 숨이 막혀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데스크 직원의 안내로 대표 방으로 들어가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이력서를 건넸다. 다른 루트로 얘기를 들어보니 신입 사원을 뽑는 회사도 아니라는데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킬지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표님은 현장 스텝과 기획팀 직원으로서의 경력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잘하는 외국어가 있는지를 물어보시며 문화 관련 분야의 해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외국어 중에서도 특히 중국어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이셨다. 아는 외국어는 있지만 잘하는 외국어는 없고 중국어는 학교 다닐 때 교양으로 한 학기 들었을 뿐이어서 다 까먹었다고 하니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러면서 예술만 오래 하다보면 숫자에 약해지고 게을러지고 끼리끼리만 놀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나태해지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너무 정확한 지적에 얼굴이 화끈 거렸다. 언젠가부터 숫자에 약해지고 게을러지고 끼리끼리만 어울린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예술이라고 주장하며 흥행 스코어나 제작비 등의 숫자엔 별 관심이 없던 시절이 있었고 영화 기획은 열심히 한다고 되는게 아니라는 생각에 언젠가 영감이 떠오르길 기다리며 한 없이 게으르게 살아왔고 친구를 만나도 영화 하는 친구만 만나왔다. 그나마 숫자와 게으름은 스스로도 문제라고 생각해서 노력으로 극복하려고 했지만 영화하는 친구만 만나는 건 노력해도 잘 개선되지 않았다.


영화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성격이 안 맞아도 대화는 통하고 얘기할 꺼리가 없으면 어느 영화가 들어가네 엎어졌네 누가 계약을 했네 월급을 떼였네 등의 정보 교환만 해도 두어시간 정도는 아무 노력 없이 흥미진진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님은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이런 이런 일을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나의 포부를 들은 대표님은 이쪽 업계 일이 혼자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며 본인이 잘 키워줄테니까 아무 생각없이 시키는 대로 잘 할 자신있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키워준다는 말과 뭘 시키는지는 말도 안해주고 시키는 대로 잘 할 자신있냐고 묻는게 웃겼지만 나이 지긋하신 어른 앞에서 내색은 못하고 그저 열심히 하겠다고만 대답했다. 대표님은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당장은 할 수 없겠지만 꾹 참고 자기가 시키는 다른 일들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하셨다.

월급은 얼마면 되겠냐고 해서 미친 척 하고 전 회사에서 받던 월급의 두 배를 불렀는데 고개를 갸웃하시더니 그 돈으로 괜찮겠냐며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말씀하셨다.


굴지의 제작사 대표님과의 면접을 끝내고 나니 당시엔 몰랐는데 어째 내 길이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갑자기 소주 한잔이 땡겼는데 남자 혼자 공원 벤치에 앉아 소주를 마시는 그림은 과히 좋지 않은 것 같아 맥주 한 캔 원샷하고 집에 왔다.


Posted by 애드맨

퇴사했다.


퇴사 전 마지막 인사를 위해 오랜만에 사무실에 나가 그동안 정들었던 동료 직원들과 대표님을 만났다. 누구는 퇴사한다고 발표하면 상사가 발목을 붙잡고 사표를 수리해주지도 않고 면담에 면담을 거듭하느라 지치고 마음도 복잡해진다는데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표를 내지 않아도 알아서 퇴사 처리가 되서 마음은 편했다.


출근(?)하자마자 내 옛날 책상에서 얼마 남지 않은 개인짐을 챙긴 후 캐비넷에 랜덤으로 쌓여있던 시나리오와 서류들을 정리했다. 내가 떠나면 누군가의 업무가 늘어날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썩 편친 않았다. 모든 걸 정리하고 사무실에 있던 동료들에게 퇴사 인사를 했다. 다들 힘들고 지친 상태라 누가 누굴 위로하고 배웅해줄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떠나는 사람에게 섭섭하다고 말해주는게 이렇게 고마울 줄은 퇴사해보기 전엔 몰랐었다.


섭섭하다고 말해줄 뿐만 아니라 사무실로 음식들을 배달시켜 조촐하게 송별회도 열어줬는데 맛있게 먹는 척 하느라 목이 메일 뻔했다. 나를 위한 송별회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동료들이 배달시켜준 음식을 먹으며 지난 이야기들을 주고 받다보니 역시 중요한건 마음 하나 뿐이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삼겹살이면 어떻고 중국 요리면 어떠리. 진심이 담긴 떡볶이 하나면 충분하다. 동료 직원들과의 조촐한 송별회를 마치고 대표방에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생각해보니 대표와 5분 이상 이야기를 해본 건 면접 때 이후 처음이었다. 첫 면접 때도 5분을 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5분도 안되는 시간 내내 이력서를 개인 블로그 포스팅처럼쓰는 건 어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꾸중만 들었기 때문에 대화다운 대화는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대표님은 팀장에게 무슨 통보를 받았는지 물어보았고 나는 들은 대로 대답했다. 대표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동안 운영해 온 식으로 기획팀을 돌리는 건 효율적이지 못한 거 같아서 결단을 내렸다며 회사는 그만두더라도 좋은 기획 있으면 언제든지 들고 오라고 했다. 한국 영화계가 불황이고 회사도 어렵긴 하지만 앞으로 다른 회사를 알아보든 프리랜서로 뛰든 영화판에서 살아남으려면 독한 마음 먹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뛰어야 된다며 나이도 나이인 만큼 몇 년 안에 뭔가 세상에 보여주지 못하면 다시는 영화하기 힘들 거라는 걱정도 해 주셨다. 예상대로 밀린 월급과 퇴직금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격려와 조언에 감사드리며 남자답게 악수 한번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방에서 나왔다. 회사가 어려운건 어려운건데 자기 사업체를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보려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팀장은 일이 있어서 얼굴을 볼 순 없었고 넘버투가 대표방에 들어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동안 복도에 서서 동료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는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다들 뭔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넘버투가 대표방에서 나오자마자 우리는 각자 짐을 챙겨 회사에서 나왔고 동료 직원들은 입구까지 나와 떠나는 우리들을 배웅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에게서 우리도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지 모르는 처지에 먼저 떠나는 직원 송별회를 열어주고 배웅까지 하는게 웃긴거 같다는 말이 나왔다. 정작 자기들 배웅해 줄 사람은 없을 거라는 개그가 인상깊었다.


넘버투와 회사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각자 대표와의 마지막 면담 내용에 대해 모니터를 했다. 모니터를 마치고 실업급여 수령 절차에 대해 조언까지 듣고 식당에서 나왔는데 아직도 밖은 훤한 대낮이었다. 밤이거나 깜깜했으면 술이라도 한잔 마셨을텐데 벌건 대낮이고 딱히 더 할 말도 없고 앞으로 안 볼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대낮에 여러 명과 한꺼번에 이별을 하고 이제는 더 이상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도 아니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쓸쓸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기 전에 나 하나 떠나도 아무 지장이 없을 이 거리를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으로서는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거라는 감회에 젖어 쭉 한번 둘러보았다. 비록 지금은 불명예 퇴장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나의 꿈을 좌절시켰던 이 거리에 얼마 남지 않은 젊음과 열정으로 시드 머니를 마련해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게임에선 다 털리고 오링나서 빈손으로 집에 가지만 다음 게임에는 꼭 이겨서 살아남고 싶다고 생각하며 힘차게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동안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비공식 업무일지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공식 업무일지를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알아서 퇴사해버리는 엔딩으로 마무리 짓고 싶지는 않았는데 세상 일이 내 맘 같지가 않군요. 뭔가 드라마틱한 엔딩을 기대하셨던 분들에게는 죄송하게 됐습니다.


영화사 기획팀에 처음 입사할 때 만해도 내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무척 행복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일을 추진하며 현실과 부딪히다 보니 닳고 닳기 시작하며 타성에 젖더군요. 이건 영화사의 문제가 아니고 순전히 저 자신의 문제였습니다. 현실과 꿈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아무런 대안 없이 일을 하려다보니 주변 사람들과 상처만 주고 받으며 제대로 되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대표한테 보여줬다가 혼난 이력서가 바로 그동안 영화일을 하며 겪었던 적나라한 실패의 리포트였는데 의도치 않게 또 다시 실패의 리포트를 작성해버렸군요. 부끄럽게도 제대로 해 놓은 일도 없는 주제에 실패의 리포트만 거의 책 한권 분량입니다. 실패의 리포트를 작성하는 그 순간 실패를 패배시킬 수 있고 새로운 도전의지와 새 비전이 창출된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올해도 드디어 12월이 되었습니다.

즐거운 연말 되시고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Posted by 애드맨

1. 메이저 영화사 + 대박 감독 + 재미있는 시나리오

호환마마, 전쟁 등의 재앙만 없다면 크랭크인 할 수 있다.


2. 메이저 영화사 +대박 감독 + 재미없는 시나리오

기획팀에서 시나리오의 문제점을 지적하겠지만 아무런 상관없이 크랭크인 할 수 있다.


3. 메이저 영화사 + 보통 감독 +재미있는 시나리오

감독 교체 의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무난하게 크랭크인 할 수 있다.


4. 메이저 영화사 + 보통 감독 + 재미없는 시나리오

영화사 대표가 밀어붙인다면 기획팀의 구박을 받으며 크랭크인 할 수 있다.


5. 메이저 영화사 + 신인 감독 + 재미있는 시나리오

영화사 대표가 밀어붙여야만 기획팀도 수긍하는 분위기 속에서 크랭크인 할 수 있다.


6. 메이저 영화사 + 신인 감독 + 재미없는 시나리오

신인감독에게 시나리오를 재미있게 고쳐오라는 숙제를 내주고 집으로 돌려보낸다.

감독은 대표 얼굴도 못보고 주로 기획팀 막내와 커뮤니케이션한다.


7. 마이너 영화사 + 대박 감독 + 재미있는 시나리오

영화사 대표가 양아치만 아니라면 크랭크인 할 수 있다.

마이너 영화사에는 기획팀이 없는 경우가 많다.


8. 마이너 영화사 + 대박 감독 + 재미없는 시나리오

영화사 대표가 정상인이고 감독에게 시나리오 수정 의지만 있다면 크랭크인 할 수 있다.

기획팀이 있다면 반대 의견을 내겠지만 대박작품 감독님 앞에서는 아무 소리 못한다.


9. 마이너 영화사 + 보통 감독 + 재미있는 시나리오

메이저 영화사와 공동제작을 시도하면 조금 더 빨리 크랭크인 할 수 있다.


10. 마이너 영화사 + 보통 감독 + 재미없는 시나리오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재미있게 고쳐달라고 부탁하고 사무실을 빌려준다.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들으며 전략적으로 기획팀과 친해지는 감독도 있다.


11. 마이너 영화사 + 신인 감독 + 재미있는 시나리오

시나리오의 컨셉을 도용당할 가능성이 조금 있다.
표절 논란이 벌어지는 가운데 영화사 대표와 신인감독이 법정에서 만날 수도 있지만
보통은 신인 감독이 그냥 참고 넘어간다.


12. 마이너 영화사 + 신인 감독 + 재미없는 시나리오

장동건을 캐스팅하거나 영화진흥위원회가 도와준다면 크랭크인 할 수 있다.



메이저 영화사는 대기업들과 친하거나 따로 믿는 구석이 있는 영화사입니다.

마이너 영화사는 메이저 영화사가 아니거나 신생 영화사 입니다.


대박 감독은 대박 작품을 연출한지 몇 년 지나지 않은 감독입니다.

보통 감독은 대박 작품 연출 경력이 없는 기성 감독입니다.


재미있는 시나리오는 읽고 나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는 시나리오 입니다.

재미없는 시나리오는 중도 포기했거나 회의를 위해 억지로 읽은 시나리오입니다.


스타 배우 캐스팅은 크랭크인을 뜻하므로 고려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Posted by 애드맨

한번쯤 우연히 만날 것도 같은데

닮은 사람 하나 보지 못했어

영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일까

저 골목을 돌면 만나지려나



재택근무 이후 우연히라도 길거리에서 동료 직원들과 마주친 적이 없다. 활동하는 동네가 비슷하고 시사회도 자주 들르기 때문에 극장에서라도 우연히 마주칠 줄 알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오랜시간 동안 매일 매일 출퇴근하며 가족보다 친구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사람들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남이 되버리고나니 예상대로 역시 망한 영화의 스텝 분위기나 망한 회사의 직원 분위기나 별반 다를게 없다는걸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사실 우연히는 아니지만 만나려면 만날 수는 있었다.


밀린 급여와 퇴직금 정산을 요구하는 직원들이 대표를 찾아가 담판을 짓는 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다든 직원들과 이 날 이때까지 하는 일 없이 인터넷 검색과 무의미한 회의만 무한 반복하던 나에게 월급을 주신 대표님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유익한 자리였는데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었던 직원의 얘기를 들어보니 대표는 진심으로 밀린 급여와 퇴직금을 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니 법적 절차를 밟든 말든 뭐든 할 수 있으면 하라고 했다고 한다. 직원들도 그런 대표 앞에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흐지부지 헤어지고 말았다는데 대표도 힘들겠지만 그동안 믿고 따르던 대표를 찾아가 이런 얘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직원들의 심정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나야 뭐 처음 면접 때부터 출근을 포기하는 날까지 대표에게 사랑받으며 회사를 다닌 적이 없으니 그러려니 해도 다른 직원들은 나보다는 대표와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비교적 불의를 봐도 잘 참는 성격인데 한 때는 학교 선배들 따라 시위하러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이미 대학 안에서도 유행이 지났고 도서관에서 취업 준비를 하는게 당연한 시절이었는데 강의실 대신 거리에서 한 철을 보내고 나니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모임에서 나와버린 그날 이후 거리의 학우(?)들과 함께 하지 않는 나 자신이 비겁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자괴감에 시달리곤 했는데 비교하는게 우습긴 하지만 그 때 그 시절 생각이 났다. 학교에서 우연히 거리의 학우들을 마주치면 어찌나 민망하던지... 물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밀린 급여와 퇴직금이라는 불의 앞에서 참지 않고 분연히 떨쳐 일어난 동료 직원들과 함께 행동하지 않은 나 자신이 어째 좀 비겁하게 느껴지지만 그냥 부질없는 것 같아서 그랬다.


언젠가 한번쯤 저 골목을 돌다 우연히 동료 직원들을 만나게 되면 반갑게 인사해야겠다.
받아주려나?

Posted by 애드맨

잘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가 투자무산으로 사이가 흐지부지해진 감독님과 사주카페에 갔다.


한때 나의 운명을 알고 싶어서 꽤나 열심히 명리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 몇 달 정도 공부한 후 아무리 공부해도 나의 운명은 알 수 없을 것 같아 중도 포기했는데 그 이후로는 남한테 돈을 주고 점을 본 적은 없다. 명리학에 정통한건 아니고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지만 대충 점장이들이 어떤 식으로 점을 보는 지 알 것 같아 이런 얘기를 돈 주고 듣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감독님은 나에게 저녁을 사주며 투자 유치엔 실패했지만 원래 영화가 다 그런거 아니겠냐며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려올 수도 있으니 희망을 갖자고 격려해 주셨다. 비록 감독님이 격려는 해주셨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 같지가 않아 겉으로만 힘내는 척 하고 속으로는 계속 좌절했는데 감독님은 그런 나의 속마음을 눈치라도 채셨는지 우리의 운명이 궁금하지 않냐며 사주카페에 가자고 제안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남자 둘이서 초저녁부터 술 마시는 것도 한 두번이지 차라리 잘 됐다 싶어 따라가 보았다.


날카로운 인상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아저씨가 감독님의 사주를 봐주었다.


사주를 믿는 건 아니지만 헛소리라도 듣고 기분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저씨는 연습장에 뭔가를 한참을 끄적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는데 혀를 쯧쯧 차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감독님의 직업이 뭐냐고 물어봤다. 감독님은 나름 재치를 발휘해 <알아맞춰보세요~> 라고 어울리지 않는 재롱을 떨었고 점장이 아저씨는 놀랍게도 혹시 연예영화 관련 업종에 종사하지 않냐고 물어왔다.


감독님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이 범상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비슷하게나마 맞춘게 신기해서 그렇다고 했고 아저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짓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점장이 아저씨는 감독님을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더니 지금까지는 아주 잘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최선을 다하면 본전은 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아왔으나 내년부터 향후 7년간은 무슨 일을 해도 쪽박이니 절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집에서 자숙하라고 했다. 나는 뭐 이런 점장이가 다 있나 싶어 당황스러웠데 감독님은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고 사람 좋게 몇 번 웃으시더니 그럼 외국에 나가면 잘 풀리겠냐고 물어봤고 아저씨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안 새냐고 대답했다. 아니 지금부터 7년이면 남자가 한 참 일할 나이인데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게 말이 되냐고 의아해하는 감독님에게 점장이 아저씨는 그냥 팔자가 억쎄게 좋은 여자 만나는 수 밖에 없다는 말만 남기고 나에게 사주 안 볼 거냐고 물어왔다.


피 같은 돈 내고 악담만 들은 감독님의 억울한 표정을 보니 이 아저씨한테 사주를 보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도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각을 알려줬다. 아저씨는 연습장에 또 뭔가를 한참을 적더니 인상을 찌푸리는게 아닌가.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내 팔자는...


.....중략.....


사주카페에서 나온 감독님은 머리가 아파서 술은 못 마시겠다고 미안하다며 집에 가버리셨다. 만약 점장이 아저씨 말대로 감독님이 향후 7년간은 안 풀리는 팔자라면 감독님과 함께 쓰는 시나리오도 최소 7년은 빛을 못 본다는 얘긴데 정말 생각만 해도 암울하다.


감독님을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드리고 집에 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한국 영화계는 향후 7년은 힘들 것 같다. 스크린쿼터가 폐지되려나...

사주를 보고나니 작년에 엎어진 오늘의 운세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Posted by 애드맨

내가 만약 포항 근처에 사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라고 가정을 해봤다.


나는 포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대학을 졸업한 후 작가가 되기 위해 취업은 하지 않고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DVD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고 손님들에게 영화를 추천해준 후 재밌었다는 얘기를 듣는 낙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물론 대부분이 남녀 커플인 손님들은 영화를 틀어줘도 딴짓만 하지만 DVD방 점원으로 위장한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지 아무 영화나 추천하진 않는다.


비록 고시원에 기거하며 밥도 제대로 못 챙겨먹지만 각종 시나리오 작법 책만큼은 출간되는 대로 다 구입한다. 시나리오 작법 책 중엔 뭐니뭐니해도 로버트 맥기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것인가>가 최고다. DVD방 일이 고되고 힘들 때면 비디오방 알바에서 세계적인 감독인 된 타란티노를 생각하며 힘을 낸다. 타란티노와 나의 차이는 비디오가게 알바와 DVD방 알바의 차이일 뿐이다.


매일 매일 조금씩 써오던 시나리오를 드디어 완성한다. 이제 영화사에 팔아야 되는데 영화사에 아는 사람이 없다. 직접 영화사에 전화할 용기도 없다. 그래서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시나리오 마켓에 시나리오를 등록한다. 2만원을 내야하고 영화사와 계약을 하면 3%를 떼줘야한다는 조건이 영 내키진 않지만 대안이 없다. 안그래도 어려운 형편에 2만원이나 내고 시나리오를 등록했다가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으면 심적으로 경제적으로 타격이 클 것 같지만 역시 어쩔 수 없다. KTX타고 서울에 가서 영화사 직접 찾아다니며 시나리오를 주고 오는 것 보다는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등록한 후 하루이틀 기다려도 연락은 오지 않는다. 2만원이 아깝다. 그 돈이면 친구들에게 삽겹살에 소주 한번은 쏠 수 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기다려본다. 한달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는다. 좌절이다. 고시원에서 먹고 자고 DVD방에서 일하며 힘들게 쓴 시나리오였는데 왜 세상은 나를 몰라주는지 원망스럽기만 하다. 애타게 기다리다 지쳐 반쯤은 포기한채 또 다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아직은 새 시나리오를 쓸 여력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02-5XX로 시작하는 번호가 핸드폰에 뜬다. 이거 서울에서 온 전화같은데...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000작가님이죠? 저는 00영화사의 애드맨입니다.> 아아...귀를 의심한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이 전화는 바로 애타게 기다려온 서울에 있는 영화사에서 온 전화다. 영화사 직원이 내 시나리오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온다. 전화로 얘기하려니 답답하다. 그냥 만나서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다. 영화사 직원도 만나자고는 하는데 포항이라고 하자 부담스러워한다. 그래서 어차피 서울에 일이 있어서 갈 예정이었다고 거짓말을하니 그럼 겸사 겸사해서 보자고 한다. 드디어 나에게 기회가 왔다.


큰맘먹고 KTX를 탄다. 강남에 위치한 영화사로 찾아간다. 서울은 와본 적 있지만 강남은 처음이다. 예의바르게 생긴 영화사 직원이 작가님이라고 불러주고 맛있는 식사도 대접한다. 여기까지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식사 후 사무실에서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한다. 영화사 인테리어가 좋고 직원들 인상도 좋아 양아치 영화사 같진 않다. 바로 작가 계약하자고 하면 좋을텐데 이런 저런 문제점을 지적하며 대안에 대해 물어온다. 시나리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니 대안도 있을 리가 없다. 그냥 생각해보겠다고만 한다.


한 시간도 안되서 미팅은 끝났다. 이대로 KTX타고 집에 가야 되나? 조금 허탈하다. 아무런 소득이 없다. 애드맨이라는 영화사 직원은 시나리오를 사겠다는 말은 절대로 안 한다. 그냥 내부 회의를 더 하고 연락주겠다는 애매한 말만 되풀이 한다. 얘기가 잘되면 서울 시내 구경도 하고 군대 동기 녀석들도 만나려 했는데 왕복 차비 생각하면 그럴 여유도 없다. 영화사에서 나와 바로 KTX에 몸을 실었다.


몇 일 후 영화사 직원에게 연락이 왔다. 시나리오는 회사에서 모니터 결과가 안 좋아 진행하지 못하게 됐으니 미안하단다. 이런... 미안하다고 될 일이냐. 처음부터 서울로 오라고 하질 말던가. 음..내가 먼저 올라가겠다고 했구나. 그래도 좀 말려주지. 그냥 영화 예매권이나 좀 달라고 하니 꼭 챙겨주겠다고 한다. 그나마 고맙네. 힘이 빠진다. 쓰기 싫다.


나의 전화 한통 때문에 멀리 서울까지 왔다가 허탕만 치고 간 000작가님에게 힘 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없어 이렇게 대신한다. 시나리오를 살 것도 아니면서 힘내라고 하면 작가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먼길 오신 작가님이 사무실을 떠날 때 지었던 허탈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 예매권 몇 장을 보내드렸던 기억이 난다. 비록 첫 작품은 불발로 끝났지만 재기발랄한 차기작으로 보란 듯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 작품을 마지막으로 아직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다. 나 때문에 창작 의욕을 상실한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회사의 내부 모니터 결과 따윈 신경쓰지 말고 부디 내년엔 더 멋진 작품으로 컴백하셨으면 좋겠다.

Posted by 애드맨

영화가 엎어지고 나면 남는 건 깐죽 뿐이다.


남들이 깐죽거리면 기분이 나쁘길래 뭔가 확실히 결정되기 전에는 아무런 말도 안하는 편이지만 아무런 말도 안하려고 해도 아무런 말도 안하고 살순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요즘 뭐하냐고 물어오면 몇 마디를 하게 된다. 몇 마디만 해도 대충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되고 일이 잘 풀릴 때야 아무런 문제가 안되지만 일이 잘 안되고 나면 영화 제목을 패러디한 농담부터 시작해서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뭐라고 했냐, 취향이 마이너라서 그렇다는 등의 깐죽을 당하게 된다.


아무렇지도 않으려고 해도 막상 술 몇잔 마신 상태에서 깐죽 십연속 콤보라도 당하고 나면 기분이 안 나쁠 수가 없다. 나도 깐죽거리는 상대방의 약점을 집어내 깐죽대기 시작하고 그러다 보면 성질 급한 놈이 먼저 상대방 멱살잡고 엎치락 뒤치락 땅바닥에서 구르기도 한다.


영화만 그런 게 아니고 회사가 힘들어져도 깐죽을 당한다. 회사가 잘 나갈 때는 아무런 말도 안하다가 막상 회사가 힘들어지면 회사 이름을 패러디한 농담부터 시작해서 인맥이 없으니 그렇지, 대표가 재벌 2세냐, 회장님 친척이냐, 무슨 베짱이냐 등등... 꿈을 이루기 위해 어렵게 날개를 등짝에 붙여 한번 날아보려다 본의든 타의든 날개가 꺽여 땅바닥에 떨어진 사람에게 깐죽거리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실패라는 결과 앞에서는 꿈을 꾼 사람들만 바보가 되고 깐죽을 당하게 된다.


아예 처음부터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본전이 목표라면 성취감은 없겠지만 깐죽도 안 당한다. 사실 포카도 그렇지만 어떤 일이든 본전도 힘들다.


개인적으로 수년간 차기작을 기다려온 감독님이 있다. 정말 좋은 감독님인데 다행히 그 힘들다는 투자도 어렵사리 받았고 정말 오랜 시간의 침묵을 깨고 새 영화를 찍었다. 나쁘지 않았다. 시나리오보다 잘 나왔다. 20대 중 초반 여성 관객들에게 기쁨주고 사랑 받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는 있었다. 여성들이 좋아라하는 스타 배우가 출연했고 A급 스텝들이 총출동했으며 홍보도 주어진 예산 이상으로 잘 됐다. 대박까진 아니더라도 본전 이상은 할 줄 알았다. 개봉도 와이드 릴리즈였다.


관객은 안 들었다. 2주를 못 넘기고 극장에서 철수했다. 감독님에게 영화 잘 봤다고 하자 사람좋은 미소가 돌아왔다. 그 날 이후 감독님을 만난 적이 없는데 어느날 우연히 논현동 밤거리 영동시장 뒷골목을 홀로 배회하는 초췌한 모습의 감독님을 목격했다.


나도 요즘은 말이 좋아 재택근무지 하루 종일 집에 있을 수는 없고 막상 집에서 나와도 딱히 갈 만한 데도 없다. 노는 동안 만날 사람들도 다 만났다. 더 이상 아무런 껀수 없이 사람들을 만나봤자 할 얘기도 없다. 혼자서 그냥 정처 없이 이리저리 걸어다니다 우연히 목격한 감독님과 술 한잔 하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보내드리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100퍼센트 감독님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본전 생각하면 재작년 작년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게 옳았다. 옳았나?

Posted by 애드맨

얼마 전 한국 영화계의 양대 대기업 메이저 영화사 중 한 곳에서 경력 사원 모집 공지가 떳길래 냅다 지원했다. 보통은 3대 대기업 메이저 영화사라고 하지만 그 중 한곳은 영화는 그만하고 건설업으로 업종을 변경한다는 루머가 있길래 제외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요즘 일이 없어 놀고 있는 영화인들 대부분이 이 회사에 지원해서 경쟁이 치열하다고는 하지만 나 정도의 경력이면 서류전형은 통과할 줄 알았다. 운 좋게 채용된다 해도 일이 너무 힘들어서 다들 금방 나간다는 소문도 있지만 그건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모집대상은 영화사업 전문성의 극대화 및 창의적 사고를 통한 역량강화를 목적으로 도입한 영화전문 직종인 프로젝트 매니저, 엑스큐터인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직종이지만 프로젝트 성과에 따른 보상이 가능하고 면접 때 열심히 하겠다고 큰소리로 외치면 어쩐지 시켜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영화사에서 제공하는 이력서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이력서의 칸을 하나 하나 채워 넣다보니 최소한 서류에서는 당연히 합격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는데 다만 걸리는 게 있다면 모집 요강에 3년 이상 경력자 중에서도 주요 흥행작품 참여경력자를 우대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동안 내가 했던 작품은 한 편도 빼놓지 않고 언제나 개봉한 해의 비흥행순위 영화 랭킹 상위권에 올라갔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마 흥행 작품 참여 경력이 없다고 떨어뜨리진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대박이 나든 쪽박이 나든 스텝의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무리 돈 계산 잘하고 현장 진행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스텝이라도 개봉 이후의 쪽박과 대박은 컨트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대 조건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이력서를 작성하다 뜬금없이 개인 재산을 적어야 되는 칸을 발견하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회사에 붙으려면 돈이 많은게 유리한지 적어야 유리한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재산이 너무 많으면 헝그리 정신이 없어 보이고 일이 힘들면 금방 나갈 놈이라는 인상을 줄 것 같고 돈이 너무 없으면 횡령이나 뇌물에 약하거나 영화사 비품 도난의 우려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 같기 때문이다. 포스트잇, 호치키스, A4용지, 볼펜, 가위, 칼 그리고 스카치테잎이 너무 자주 떨어지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빈칸으로 남겨뒀다.


정성스레 이력서를 작성한 후 지원 버튼을 클릭했는데 몇 주가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 서류 전형 합격자에 한하여 유선으로 통보 한다던데 이력서 제출 이후 나에게 전화한 사람은 친구랑 가족 그리고 스팸업자들 뿐이다.


서류전형에서 탈락이라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 처음엔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다. 과거의 동료들이 경쟁자가 되어버린 비정한 현실과 나를 서류전형에서 탈락시킨 메이저 영화사 대표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제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력서를 작성한 후 지원하기 버튼을 클릭할 때 실수를 한 것 같다. 왠지 전산상의 착오 때문에 제대로 이력서가 접수되지 않았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건 나의 잘못도 메이저 영화사의 잘못도 아닌 단지 전산상의 오류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지원하지 않은 셈이다.


그래서 이제는 김광섭 대표님을 그만 미워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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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애드맨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으로서의 비공식업무일지를 슬슬 마무리 지을 때가 되고나니 문득 내일의 죠가 생각났다.


망해가는 영화사에 다니며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초심을 잃고 불안, 초조, 원망, 후회, 저주 그리고 자격지심에 시달리다 하루 하루 소모되며 껍데기만 타다 꺼져 버리는 어설픈 영화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소리 소문 없이 은퇴한 선배들처럼 되기 싫어 나도 영화일에 매진하며 얼마 남지 않은 열정을 본격적으로 불태우고 싶었지만 결국 일거리 창출에 실패했고 그 상실감에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블로그에 다소 과하게 매진하며 여기까지 달려왔다.

남의 일인줄로만 알았던 꿈이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며 중간 중간 제 풀에 지쳐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흐지부지한 현실이 지겨워 시작한 블로그였는데 여기서만큼은 흐지부지한 결말을 보기 싫다는 오기가 컸다. 블로그에 글을 쓰며 불안, 초조, 원망, 후회, 저주 그리고 자격지심 등의 감정들을 다 불태워버리고 나니 이젠 정말로 하얀 재만 남은 기분이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는다. 물론 후회도 없다.


비록 한 순간일지언정 눈부실 정도로 새빨갛게 젊음을 불태워버린 죠는 진짜로 하얀 잿가루가 됐지만 어차피 미련 없이 불태웠을 때 남는 건 하얀 잿가루 뿐이다. 야생마 녀석이나... 그 카를로스 역시 틀림없이 그랬을 테니까. 그래... 최후의 순간까지 불태워 버리겠어. 아무런 후회도 없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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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다... 불태웠어... 새하얗게...


p.s. 제정신입니다 ㅎㅎ

Posted by 애드맨

기획팀은 조만간 모든 걸 정리하기로 합의를 봤다.


우리 세 명이 같은 날 같은 때에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한날 한시에 퇴사하자는 결의를 한 적은 없지만 계속 근무한다고 해도 달라질 일은 없을 거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고 퇴사하겠다고 해도 아무도 붙잡는 사람이 않으니 예정된 퇴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번 퇴사가 나의 의지는 아니지만 쪽팔리지는 않고 싶다. 한국 영화계가 불황이라서 어쩔 수 없고 내 주변 영화인들도 다 놀고 있다는 핑계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껏 고용해줬지만 결과물이 없으니 투자한 월급이 아깝다고 판단했기 때문일테니 영화계 불황은 결국 핑계일 뿐이다.


영화사 입사 이후 내가 아이템을 발굴해서 허락을 받은 후 작가를 붙여 진행시킨 서너개의 프로젝트 중 현재까지 살아있는 프로젝트는 하나 뿐이다.


처음부터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진행했던 것은 아니고 작가와 나 둘이서만 좋다고 신나서 밀어붙였는데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팀장의 오케이 싸인이 떨어졌고 대표는 돈을 준비해왔다. 구박받고 서럽고 슬프고 파란만장하고 다사다난한 차마 말 못할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작가의 통장에 계약금이 입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의 감동은 지금 생각해도 감회가 새롭다.


회사가 망해가고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품을 진행할 수 없게 됐을 때쯤 다행히 그 프로젝트를 인수하고 싶다는 돈이 많다는 영화사가 나타났고 지금은 작품을 넘기는 절차가 진행 중이다.


회사 차원의 비즈니스가 시작된 후엔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아마 이 작품이 다른 회사로 넘어가고나면 이 원작 아이템을 처음 본 순간 꼭 영화화하고 말겠다고 다짐했던 나의 각오와 애정 그리고 작품 개발 허락을 받기 위해 원작자를 처음 찾아가서 만났을 때의 설레임 마지막으로 같이 일해보자고 연락한 작가에게 꼭 같이 일하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기쁨 등의 감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내가 영화화를 추진하던 작품이 잘 진행되고 있다니 처음에 이 작품은 안된다고 나에게 말해주던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고 내가 옳았다는 사실이 증명된 거 같아 나 스스로 뿌듯하고 이 작품을 위해 수고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지만 이제부터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의 회사 작품이고 크레딧에도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화가 난다.


팀장님은 기획 크레딧에 최초 개발자인 내 이름을 올릴 수 있도록 건의는 해주겠다고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그건 이루어지기 힘든 꿈같은 얘기일 뿐이다. 그 회사에도 기획팀이 있고 모두의 반대를 이겨내고 이 작품을 해보자고 주장한 사람이 있을테니 그 사람의 이름이 기획에 오르는게 당연하다. 그 사람이 날 언제 봤다고 기획 크레딧을 공유하고 싶겠는가.


작가는 술만 마시면 나에게 전화해 우리 모두의 노력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다른 회사로 가서도 절대 잊지 않겠다고 감사하다고는 하지만 나도 그 작품을 진행시킬 수 있도록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작가가 고마울 뿐이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그냥 허탈할 뿐이다. 정신건강을 위해 이 작품의 극장 개봉일에 출발하는 한달 정도 코스의 동남아 여행 패키지 상품이라도 알아봐둬야겠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변함없지만 나는 이제 그냥 이 작품을 남들보다 조금 더 좋아하는 팬의 한사람일 뿐이다.

Posted by 애드맨

망해가는 영화사에 사직서를 내고 온 새침떼기와 소주를 마셨다.


새침떼기를 생각하면 언제나 맞은 편 책상에 앉아 인터넷을 하는 해맑은 얼굴이 기억난다. 영화인의 꿈을 이뤄보겠다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우리 회사에 힘들게 들어와 정말 열심히 일할 각오를 했었지만 결국 한 작품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사회 초년생의 눈에 훌륭한 인생 선배로 기억되고 싶어서 발전적인 관계로 잘 지낼 수 있을만한 사람들도 소개시켜주고 좋은 말도 많이 해 준다고 했는데 결국 그녀의 인생에 별 도움은 되지 못한 실속없는 인생 선배로 남게 됐다.


그녀는 그토록 바라던 현장으로 가겠다고 했다. 비록 모두에게 축복받는 유명한 스타가 나오는 영화는 아니고 개봉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큰 저예산 독립 영화지만 드디어 현장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안 그래도 큰 두 눈이 유난히 반짝 반짝 빛났다.


제목을 들어보니 예전에 시나리오를 읽어본 기억이 났다. 넘버투에게 들어온 시나리오를 내가 먼저 읽은 후 투자 부적격 판정을 내렸고 혹시나 해서 읽어본 넘버투도 나와 같은 결론을 내린 후 잊어버린 바로 그 영화였다. 왠만하면 메이저 영화사에서 스타가 두 명 이상 나오는 영화 현장으로 가라고 말해주려다 도와 주지도 못할 거면서 괜한 소리 하지 말아야겠다는 자격지심에 입을 다물었다. 하긴 그런 영화 할 수 있었으면 벌써 했겠지.


자기도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흥행이 잘되거나 와이드 릴리즈로 개봉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무작정 현장으로 가고 싶은 마음 밖에 없고 어떻게든 현장에서 살아남아 나중에 영화사를 차리고야 말테니 행운을 빌어달라고 했다. 굿럭.


회사 차원의 송별회는 없었다. 현장일을 갑자기 하게 됐고 사직서도 급하게 냈기 때문이다.


문득 나를 위한 송별회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는데 나를 위한 송별회 따윈 열리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다들 오늘 내일 하는 마당에 누가 누굴 위해 송별회를 준비하겠는가. 우리 회사의 첫 송별회는 삼겹살에 소주였고 두번째 송별회는 중국집요리와 맥주였다. 그때 떠난 직원들은 비교적 융숭한 대접을 받은 셈이다. 이런 게 타이밍이라는 걸까?


그녀는 헤어지기 전에 대표님 차가 더 좋은 차로 바꼈다며 회사 사정이 좋아진 것 같으니 희망을 가지라고 했다. 회사 사정은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질 리가 없다는 걸 여러 루트를 통해 들은 바가 있어 뻔히 아는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려운 때 일수록 기죽지 않고 절대 불황의 파도를 더 좋은 차로 타고 넘으려는 대표님의 사나이다운 기개가 느껴졌다. 이런 게 역발상이구나.

정말 우리 대표님은 일반인들과는 스케일 자체가 다른 대인배시다.
대표님 최고!

Posted by 애드맨

내 아이템이 좋다며 의기투합했던 감독님에게 투자가 무산되서 당분간 함께 일을 진행하기 힘들게 됐다는 심야 전화를 받고 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사실은 얼마 전 감독님에게 잘하면 내 아이템으로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을 비우니까 오히려 일이 잘 되는구나 만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 했는데 역시 영화 일은 계약서에 도장 찍고 통장에 돈 들어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다짐도 기대도 금물이다. 일이 잘 되는 줄 알고 기고만장 건방져지기 전에 투자가 무산되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마음을 비웠고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면 거짓말이고 사실 이번엔 제법 기대가 컸었는데 투자가 무산되고 나니 머리 속이 멍하고 그냥 잠이 안 온다. 작가와 함께 둘이서 몇날 몇일을 회의하고 신나게 써 내려갔던 시나리오도 다시 읽어보니 뭐가 재밌다는 건지 모르겠고 감독님은 조금 더 고쳐보자고 하지만 나는 의욕상실이다. 내 생각이 옳다는 걸 세상에게 증명해보고 싶었지만 세상이 싫다는데 어쩌겠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함께 하자고 의기투합했던 팀은 밥벌이를 위해 자동 해산되는 분위기고 시나리오는 다시 나의 품으로 돌아왔다. 미안하게 됐다고는 하지만 누가 누구한테 미안해할 일은 아니다. 이 모든 게 다 내가 못난 탓이고 인과응보다.


망연자실 케이블 티비만 보고 있다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블로그에 적으면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느덧 블로그와 리얼 라이프의 주객이 전도되어버렸다.


투자가 무산되고 팀이 해산된 우울한 상황을 블로그를 통해 즐기고 있는 것처럼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월급을 못받고 있는 지금 이 상황도 은근히 즐겨온 것 같다. 대표님이 월급을 꼬박 꼬박 챙겨줬으면 서운할 뻔했다.


만약 당장 내일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밀린 월급을 몽땅 입금시켜준 다음 이제 그만 해산하자고 하면 나는 더 이상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이 아니니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비공식 업무일지 블로그도 안녕인데 목돈이 생기는 건 좋지만 블로그를 하며 느껴온 즐거움도 안녕이라고 생각하면 마냥 반갑진 않다.


그냥 월급이랑 퇴직금은 좀 늦게 줘도 되니까 그 핑계로 블로그를 조금 더 오래 하고 싶다.


이제는 시나리오를 쓴 다음부터 벌어지는 모든 일이 지겹다. 재밌게 읽었냐고 물어보는 것도, 다양한 의견의 모니터들을 정리하는 것도, 각색 방향 놓고 말싸움하기도, 투자 캐스팅 제안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도 다 부질없는 것 같다.


정 영화를 만들고 싶으면 그냥 혼자 시나리오 쓰고 혼자 촬영과 편집까지 마친 다음 저용량 동영상 파일로 만들어서 내 블로그에만 올리는 방법을 생각해봐야겠다. 뭐지?;;;

Posted by 애드맨

예전에 작가와 조감독으로 만났던 아무개 조감독을 우연히 다시 만났다.


세월이 흘러 조감독은 감독이 됐고 작가는 이 바닥 저 바닥 전전하다 영화사 직원이 됐지만 막상 얼굴을 보고나니 예전처럼 패기넘치는 작가와 조감독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때 그 시절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 그 시절이라고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면 패기와 열정이 흘러넘쳤기 때문인지 좋은 일만 기억났다.


한참을 즐겁게 옛날 얘기를 나누다 갑자기 씁쓸해졌는데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누굴 만나도 자꾸 옛날 옛적 좋았던 시절 얘기만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다 조만간 다른 일을 하게 되고 다시는 영화일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자주 드는데 옛날 얘기와 관련된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몇 년 전에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할아버지 영화 감독들이 조그만 사무실에 모여앉아 짜장면 한그릇씩 배달시켜 놓고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자리에 잠시 머문 적이 있다.


그들의 옛날 얘기는 대부분 <누가 누구랑 잤었지, 아니야 그날 내가 잤어, 걔가 참 괜찮았는데 말야, 거짓말 하지 말어, 진짜라니깐, 설렁탕은 어디가 맛있지, 아니야 그 옆집이 더 맛있어> 등의 영화 제작 당시의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담배 연기로 가득찬 사무실에서 할아버지 감독 대여섯명이 모여앉아 영화 얘기는 하지 않고 맛있는 식당 얘기와 여배우들과 재미 본 얘기만 나누는 모습을 보고 절대로 저렇게 늙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이 상태로 아무 일 못하고 몇 년 지나면 나는 저런 얘기조차 할 수 없는 한때 잠깐 영화계 주변에서 얼쩡댔던 영화인 지망생으로 끝나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런 저런 생각에 싱숭생숭하기도 했고 나와 같은 출발선에 있던 아무개는 영화를 만들어서 극장 개봉까지 한 진짜 감독이지만 나는 이렇다 할 결과물이 없는 영화사 직원일 뿐이라는 자격지심에 기분이 슬슬 나빠지려고 했다. 치열하게 현장에서 뒹굴며 영화를 찍은 사람 앞에서 나는 당신이 치열하게 영화를 찍을 동안 규칙적으로 출퇴근하고 주5일이라 토요일엔 놀고 사무실에선 열심히 인터넷 검색을 했다고 할 수도 없어 빨리 집에 가서 스타리그나 봐야겠는 마음만 가득했는데 마침 옛날 얘기꺼리도 다 떨어질 때쯤 아무개 감독은 뜬금없이 작품 하나 같이 해볼 생각 없냐고 제안을 해왔다.


그동안 나 혼자 신나서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가 상처도 많이 받고 깨질만큼 깨지고 지칠만큼 지쳤기 때문에 예전 같으면 영화 한편 같이 하자는 제안을 들으면 귀가 솔깃하고 피가 끓어올랐지만 이제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다. 반쯤은 기대를 접은 상태로 작품 설명을 들었는데 우습게도 조건반사처럼 여건만 맞는다면 같이 하고 싶다는 대답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문제는 여건만 맞는다면인데 여건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진행하다보면 누군가는 상처를 받게 마련이고 이제 재방송은 지겹다. 아무개 감독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여건이 조성되면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고 나는 또 다시 조건반사처럼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도 연락을 달라고 빈말을 했다.


집에 돌아와 아무개 감독의 작품에 관객이 몇 명 들었는지 검색해봤다.

숫자 뒤에 동그라미가 몇 개 없어 눈물이 앞을 가릴 뻔 했다.

Posted by 애드맨


비록 몸은 집에 있지만 로그인만하면 사무실의 동료 직원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


오늘 아침에도 출근하는 기분으로 로그인해 둘째 언니와 장시간 채팅을 했다. 로그인만 하면 대부분의 직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재택근무지만 마음만큼은 사무실이다. 어차피 우리는 같은 사무실 바로 옆자리에서도 콰이어트 Q세대답게 메신저로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몸만 사무실에서 집으로 옮겨왔을 뿐 그다지 달라진 건 없다.


한번은 우리 회사에서 작품을 준비중이신 중견 감독님께서 어째 영화사가 너무 조용해 영화사 같지가 않고 고시원이나 도서관 같다고 다들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어색해하시길래 요즘은 메신저라는 게 있어서 굳이 말을 안해도 의사소통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메신저로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는지 친절하게 시범을 보이며 설명해준 기억이 난다. 부디 감독님 영화가 잘 되서 충무로 중견 감독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는데 일단 우리 기획팀의 감독님 작품 흥행에 대한 공식입장은 만장일치 대우려다.


둘째 언니와는 벌써 11월 말인데 올 한해도 작년처럼 하는 일 없이 다 가버렸다는 넋두리부터 시작해서 요즘 영화판 다 망해서 추워죽겠다는 주제로 채팅을 했는데 메인 이슈는 2007년 최고의 굴욕 선정이었다.


개인적인 굴욕이 아니라 영화사에서 겪었던 일과 관련된 굴욕으로 범위를 좁혔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굴욕들이 떠올라 합의는 보기 힘들었지만 현재 작품들의 연이은 대박으로 잘나간다고 모두가 인정하는 아무개 감독님에게 누추하지만 우리 회사에 오셔서 작품 연출 좀 해달라고 정중하게 시나리오 한편 전달했다가 일을 이 따위로 하는 거 아니라고 벌건 대낮에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서 꾸중 들었던 사건이 유력한 올해 최고의 굴욕상 수상 후보로 거론됐다.


그 날 생각만 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우리 회사에는 감독과 배우가 약하다는 이유로 메인 투자가 되지 않는 작품이 한 편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투자가 될 조짐이 보이지 않아 회사에서는 만약 요즘 최고로 잘나가는 아무개 감독님께서 연출을 맡아준다면 스타 배우로 캐스팅이 될테고 메인 투자도 결정될 수 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아무개 감독님의 조감독과 친구 사이인 나에게 시나리오 전달 임무를 맡겼다.


무능력한 나에게 이 날 이때까지 월급을 준 회사에 보은하기 위해 평소 친하게 지내는 아무개 감독님의 조감독으로 일하는 친구에게 전화해 아무개 감독님에게 시나리오 한편을 전달하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는 마침 우리 회사 앞 커피숍에서 아무개 감독님과 만나기로 했으니까 시나리오 들고 나오라고 했고 나는 이 기쁜 소식을 회사에 전했다.


흥행 감독님에게 시나리오 주고 오겠다고 하자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고 이렇게 빨리 일이 되다니라고 놀라워하는 직원들의 얼굴을 보며 드디어 나도 밥값 한번 할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회사 앞 커피숍에 가자 아무개 감독님이 친구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나는 간략하게 자기 소개를 드리고 명함과 함께 시나리오를 전달했다. 감독님이 우리 회사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길래 나는 늘 하던 레파토리대로 회사의 히스토리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했다.


일이 잘되려는지 아무개 감독님은 시나리오에 대해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호감을 표시하셨고 작품이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현재는 어떤 단계인지 궁금하다고 설명을 부탁했다. 시나리오 전달 임무를 맡은지 1시간도 안되 시나리오가 전달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 까지는 좋았다. 정말 일이 잘 되려는가보다 싶어 잔뜩 기대에 부풀었고 충무로에 럭셔리 꽃미남으로 널리 알려진 친구에게 나중에 거하게 술이든 뭐든 쏴야겠다고 다짐했다.


감독님에게 현재 이 작품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솔직하게 고백한 다음 정중하게 연출을 부탁드렸는데 나의 고백을 다 들은 감독님은 무슨 그런 족보없는 상도덕에 어긋나는 개같은 경우가 있냐며 조용하게 화를 내셨다.


물론 내가 생각해도 무리가 있는 부탁이었지만 막상 씨네21에서만 보던 요즘 최고로 잘나가는 흥행 감독님이 화를 내는 걸 보고 있으려니 정말 말이 안되는 일을 하려고 했다는 게 온 몸으로 느껴졌다. 나를 자리에 부른 친구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스러워하며 분위기를 수습하려했고 감독님은 잠시 후 화를 가라앉히고 시나리오 따윈 테이블 구석으로 던져놓고는 영화 일을 그 따위로 하면 안된다고 훈계를 하셨다. 나는 감사히 꾸중을 듣고 언제 소주나 한잔 하자는 위로와 함께 바로 회사로 돌아왔다.


팀장에게 일을 그 따위로 하는게 아니라는 꾸중만 들었다고 보고하자 회사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 분위기로 돌아갔고 나는 내 자리에 앉아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다 칼퇴근했다.


나는 이 사건을 올해 최고의 굴욕상 후보로 밀었고 언니는 그건 회사가 쪽팔린 거지 니가 쪽팔려할 일이 아니라며 마지못해 합의해주었다.


감독님과의 만남을 주선해준 친구에게 전화해 그 날의 미팅이 올해 최고의 굴욕상을 수상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주었다. 친구는 아니나다를까 감독님도 영화일 하다보니 별 일을 다 겪는다고 심심할 때마다 그 날 일에 대해 얘기하고 어설픈 미팅을 주선한 자기한테도 앞으론 잘 알아보고 일처리하라고 한소리하셨지만 다 지나버린 옛날 일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그 작품은 결국 엎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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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보은을 위해 이번 제 260회차 로또에 출마한 애드맨입니다.


저는 평범한 블로거입니다. 남들보다 잘나지도 않았고 남들만큼 돈도 못 벌고 남들보다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댓글이 달리는 블로그 꿈 포스트에 직접 댓글을 달아 저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신 여러분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자신합니다.


그래서 몇몇 분들이 좋은 꿈이라며 조언해주신 대로 로또를 샀습니다. 제가 만약! 이번 로또에 814만분의 1의 경쟁을 뚫고 당선이 된다면! 그런 평범한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약소하나마 저의 진심을 여러분의 계좌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잘하는 것도 없고 잘난 것도 없는 저의 꿈을 이뤄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선택이 기쁨이 되도록 이 한몸 바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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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애드맨
블로그에 수십개의 댓글이 달리는 꿈을 꿨다.
Posted by 애드맨

밀린 급여 문제에 대한 대책 회의가 있었다.

나처럼 출근을 포기한 직원들 위주로 모였는데 그중엔 밀린 급여 기다리느니 실업 급여 받는게 빠르겠다 싶어 아예 퇴직해버리고 실업 급여를 기다리는 직원도 있었다. (천잰데...?) 여전히 대표님을 믿고 있는 직급이 높은 직원들과 직급은 낮지만 대표님과 자신이 각별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직원은 대책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은 없고 대책 회의를 해도 별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오랜만에 정든 동료 직원들 얼굴을 보고 싶어서 자리에 나갔다. 역시 대책 회의라고 해 봤자 별 수는 없었지만 그 동안 같은 회사 직원이라는 이유로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주고 받으며 회포를 풀고 우애를 다질 수 있어 보람 있었다.


적당히 술이 들어가고 취기가 오르자 그동안 무슨 대단한 일 한다고 필요 이상으로 격식과 예의를 차렸는지 후회스러울 정도로 분위기가 허물 없어졌는데 아마 회사에 다닐 때와는 달리 보다 분명한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인 자리여서 그랬던 것 같다. 할 말이 없어지고 분위기가 썰렁해질 때마다 밀린 급여 얘기를 꺼내면 다시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출세할 가망이 없는 사람들끼리는 사이가 좋은 법이라고 했던가. 같은 목적을 가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금방 친해지는 이유를 알았다. 그럼 회사에 다니는 동안 우리는 뭐였지?


다들 회사에서 나오려는 마당에 아무개 과장님 아무개 대리님하며 비슷한 나이였던 주제에 직급이 다르다고 서로 까칠하게 경어를 썼던 과거를 아쉬워하며 다들 말을 놓자고 합의를 봤는데 물론 그 와중에서도 절대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직원도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어느 모임이든 똑같은 인간만 모여 있으면 재미가 없고 숨이 막힌다. 모두가 의기투합하는 가운데에서도 나는 싫은데? 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 자리가 술도 더 맛있는 법이다.


술을 못 마시는 줄 알았던 직원들도 얼굴이 새빨게지도록 술을 마셨고 그동안 회사에서 했던 그 어느 회식보다도 분위기가 더 좋았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대표님에게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주고 받으며 이렇게 뒷담화로 끝내는게 아니라 조만간 단체로 대표님을 찾아가 어떻게든 결말을 짓겠다고 의기투합했다.


다른 팀 직원들이 이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를 하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솔직히 잘한 것도 없는 주제에 딱히 더 할 얘기도 없고 밀린 급여는 절대 나올 수가 없다는 걸 여러 루트를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대표님과의 대화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대책모임의 대장은 나의 얘기를 곰곰이 듣더니 내 입장도 이해는 하지만 어쨌든 찾아가기 전에 연락은 주겠다고 했다.


기분이 좋아 1차 술값과 2차 술값의 반은 내가 냈다...ㅜㅜ;;;

Posted by 애드맨

올해 한국 영화의 수익률이 크게 악화된 것으로 드러났다.


영화진흥위원회 영상산업정책연구소는 한국영화의 평균 수익률이 지난해 -22.9%에서 올해 -62.1%로 급락했다고 19일 발표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영화 한편에 들어가는 총비용이 지난해 50억 1900만원에서 64억 7500만으로 늘어났지만 총매출은 38억 6800만원에서 24억 5600만원으로 줄어들었다. 총비용이 증가함에 따라 평균 손익분기점은 지난해 132만명에서 196만명으로 늘어났다.


연구소측은 올해 9월말까지 개봉한 한국영화 81편 가운데 겨우 5편만이 손익을 맞춘 것으로 추정했다.


2007년 한국영화 대쪽박 기사를 접하니 씁쓸하면서도 그나마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든다.


사실 작년부터 내 마음 한구석에는 남들 다 열심히 일하고 인생을 즐기고 있는데 나만 왜 이러구 살아야 하나라는 자괴감이 있었다. 그러나 영상산업정책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나와 우리 망해가는 영화사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영화사가 망했고 작년과 달리 요즘은 잘난 사람 잘난대로 놀고 못난 사람 못난대로 놀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 이 현상은 꼭 영화판에만 적용되진 않는다. 명문대 나온 엄마 친구 아들도 놀고 있다고 한다.


나만 혼자 놈팡이 백수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니 불행 중 다행이다. 하향평준화로 인한 건설적이지 못한 안도감이지만 일단 작년부터 나를 괴롭히던 자괴감은 거의 사라졌다.


워렌버핏은 주식투자를 야구에 비유했다. 투수가 던지는 볼은 투자대상 종목으로 비유된다. 투자자는 볼(종목)을 선택해 적절한 시점에 스윙(매수)하면서 타점(매매차익)을 낸다. 따라서 타자는 타석에 들어서서 완벽한 볼이 올 때까지 오랜 기간동안 기다릴 수 있다. 영화로 비유하자면 이거다 싶은 느낌이 오는 작품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안하고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나쁜 전략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그냥 좋은 작품을 기다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참여한 영화 한 두편만이 아니라 내 영화 인생 전체의 손익분기점을 계산해봤는데 영화일을 하기 위해 투자한 총비용에서 영화일을 하면서 벌어들인 금액을 빼보니 아직 손익분기점에 한참 모자란다. 영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일로 벌어들인 돈이 영화일 하면서 번 돈보다 많다는 황당한 손익계산서를 보고 있자니 나보고 영화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고3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하지만 고3 담임 선생님 말을 따랐다면 영화일을 하면서 느꼈던 즐거움은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으로만 남아 있을테니 후회는 없다.


이 모든 일이 내가 못난 탓이지만 영화일을 하기 위해 투자했던 비용 중 반드시 지출해야 되는 줄 알았던 영화학과 등록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다. 학문과 실무 교육 사이에서의 혼란은 어쩔 수 없다 쳐도 각종 외부행사로 인한 잦은 휴강을 생각하면 역시 등록금은 아깝다. 영화학과가 더 많아졌다고 하는데 요즘은 뭘 가르치고 있을까?

Posted by 애드맨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으로 일하는 언니가 영화 제작을 결심했다.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받은 월급을 모아 장편 상업 영화는 아니고 단편 영화를 한편 만들려는데 시나리오와 헌팅은 마쳤으니 이제 사람이 필요하다고 나에게 혹시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수년간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고맙고 친한 언니가 영화를 만든다는데 집에서 놀고 있는 주제에 당연히 도와줘야겠지만 내 상황이 예전같지 않아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차분하게 생각한 후 냉정하게 거절했다.


한 장소에서 만드는 짧고 간단한 영화라면 또 모르겠는데 이 추운 겨울날 실내도 아닌 삭풍이 몰아치는 길거리에서 최소한 일주일은 서울 시내 여기저기와 경기도까지 돌아다니며 낮이고 밤이고 카메라와 조명기를 붙들고 지나가는 행인과 차량을 통제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귀가 시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왜 학교 다닐땐 가만히 있다가 이제와서 뒤늦게 뜬금없이 단편 영화를 만들겠다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다고 갑자기 열정이 불타오르기라도 했냐고 물어봤다.


언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도 내 돈으로 영화를 한번 만들어보겠다고 하자 모든 사람이 말리고 있지만 요 몇일 영화제 수상 단편 영화들을 쭉 찾아봤는데 별 거 없더라며 자기라고 영화를 만들어서 상을 받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냐고 나도 한번 만들어보고 싶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물론 단편 영화 잘만들어서 칸느 국제 영화제라도 갔다온다면 제작비 500만원 정도는 투자할 가치가 있지만 내가 시나리오를 읽어본 느낌으로는 비록 흥행 예상은 거의 틀렸지만 칸느는커녕 국내 영화제 본선 진출도 힘들거 같다고 냉정하고 솔직하게 얘기했는데 이미 단편 영화 감독 입봉을 결심한 언니의 마음을 되돌릴 순 없었다.


단편 영화를 만든 후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에 대해서 이미 수 없이 겪어봐서인지 단편 영화를 처음으로 만들어보겠다고 결심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는 언니를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화를 한편 찍어보겠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온갖 민폐 다 끼쳐가며 괴롭히다가 결국 영화는 완성도 못하고 남은 필름은 불태워버린 열정만 가득했던 내가 처음으로 단편 영화를 만들려던 시절이 생각나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언니는 사람도 좋고 평소 인간관계가 좋아 영화 제작을 도와주는 사람이 줄을 섰다고 못 도와주는 내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고 야속하다고 원망도 하지 않는다고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언니의 열정이 부러웠다.

나의 열정은 어디로...

Posted by 애드맨

내가 만약 투자사 대표였다면 지금쯤 빚에 허덕이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블로그에 썼던 흥행예상 리뷰를 다시 읽어보니 펀치레이디는 완전 쪽박으로 나의 예상이 적중했지만 바르게 살자와 식객은 예상과는 달리 대박이고 잘 될줄 알았던 어깨너머의 연인과 잘 되길 바랬던 M은 쪽박이다. 세븐데이즈는 예상과는 달리 입소문이 대박이고 시청률 대박을 예상했던 색시몽과 와인따는 악마씨는 지금도 방영중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반응이 미미하다.


8타수 1안타. 8번 예상해서 1번 맞춘 셈인데 만약 내가 투자사 대표고 실제로 내가 잘 될거라고 예상했던 작품에 투자해서 8편 중 1편만 수익이 났다면 지금쯤 빚독촉에 쫓겨 핸드폰 해지하고 잠적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얼마 전 창고에서 썩는 한국 영화라는 기사에 언급된 창고에서 썩고 있는 영화 중 한편도 촬영 전에 시나리오를 읽고는 잘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오다가다 만난 영화인들 중엔 내가 제규랑 같이 쉬리를 할 뻔했다거나 웰컴투동막골 투자를 거절했다거나 괴물이 망할 줄 알고 투자하지 말라 그랬다거나 왕의남자가 잘될 줄 누가 알았겠냐는 말을 넋두리처럼 늘어놓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이제와서 과거를 회상하며 그때 그러는게 아니었는데라고 후회해봤자 한번 떠난 버스는 후진하지 않는다.


그때 나와 함께 마이너리그에서 놀던 친구가 나와는 다른 선택을 하고 잘 나간 다음부터 전화 한번 안 한다거나 의리가 없다거나 술을 안 산다는 등의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해도 이제 그 친구는 메이저리거다.


친구는 메이저리거. 나는 메이저리거가 된 친구를 회상하며 소주 한잔 기울일 때마다 그 때 그 길로 친구따라 갔으면 지금 이 모양 이꼴은 아닐 거라는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술만 마시면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메이저리거가 있다는 자랑을 하는 비주류 마이너리거.


내가 영화를 보는 눈은 누구보다 정확하다고 막연히 자부해왔으나 최근 8타수 1안타라는 흥행예상 모의투자 결과를 보고나니 자신감이 없어진다. 그러나 흥행 예상은 적중하지 못했지만 들쑥날쑥이 아니라 일관성 있게 틀렸으니 일말의 희망은 있다. 만약 영화 투자사 대표가 되면 나의 직감과 반대로 베팅하면 승산은 있다.


조선시대 동성애를 다룬 왕의남자, 크랭크업조차 의심스러웠던 태극기 휘날리며 그리고 농촌 총각과 에이즈 다방레지의 러브스토리 너는 내 운명의 대박을 누가 예상했겠냐고 스스로를 위로해보지만 그럼 너는 왜 그런 영화들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으면서 기회를 잡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결국 다 내 잘못이다.


마을금고연쇄습격사건은 잘 안될 것 같다.

Posted by 애드맨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몇 년전에 친구와 공동집필했다가 아무 소득없이 곱게 하드에 저장해둔 시나리오 한편을 현재 잘나가는 영화사 직원인 후배에게 보여주었다. 시대가 변했으니 사람들이 시나리오를 보는 눈도 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메신저로 시나리오를 보내고 얼마 뒤 후배가 다소 흥분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이 시나리오 누가 쓴거예요?>


시나리오에 내 이름이 적혀 있으면 정정당당한 모니터에 방해가 될까봐 시나리오를 보내기 전에 작가 이름을 다 지웠는데 다짜고짜 누가 썼는지부터 물어보다니 느낌이 좋지 않았다. 메신저를 오래 하다 보면 글자만 봐도 대충은 글쓴이의 심정을 느낄 수가 있다.


대충 그냥 아는 작가가 쓴건데 입봉도 못한 무명이어서 이름은 말해줘도 모를거라고 하자 그럴줄 알았다고 살다 살다 이렇게 여성비하적인 유머로 점철된 기분 나쁘고 더티한 시나리오는 처음 읽어본다고 불쾌해했다. 자기가 여자여서가 아니라 정말 심하게 짜증나고 시나리오 읽느라 투자한 시간이 아깝다고 억울해했다. 이거 읽느라 칼퇴근도 못했으니 나중에 저녁 한번 사내라고 길길이 날뛰었고 만약 자기네 영화사에 이런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아무도 안 보여주고 바로 이면지로 재활용하고 싶은 수준이라고 총평했다.


그나마 오빠가 보여주는 거니까 끝까지 읽었지 처음 세장 읽고부터는 정말 읽기 싫었다며 왜 이 작품이 쓰레기인지 조목조목 꼬치꼬치 따져가며 가슴을 후벼팠다. 나는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일들이 다 전생의 업보라고 생각하고 글쓴이가 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후배의 혹평을 가슴에 하나하나 새겨두었다. 사실 몇 년 전에 시나리오를 돌릴 때도 다 한번씩 들었던 말이라서 새삼 충격적일건 없지만 세월이 흘르고 세상이 변했지만 사람들이 나와 친구의 시나리오를 보는 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후배의 모니터를 듣는 내 반응이 평소와는 달랐는지 후배는 혹시 이 작품 오빠랑 관계된 작품 아니냐고 물어왔는데 나는 사적인 감정이 배제된 정정당당한 모니터를 듣고 싶다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했고 후배도 나랑 관계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거 같아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내가 몇 년 전에 친구와 함께 공동으로 쓴 작품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후배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내가 예전에 그 시나리오 비슷한 내용의 시나리오를 친구와 쓰고 있다고 얘기해 준 기억이 나서 중간 부분을 읽을 때쯤 이 시나리오가 나랑 관계있는 시나리오라는 걸 눈치는 챘는데 직접 쓰기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고 놀라는 척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진 것 같아 나는 시나리오의 줄거리 정도만 구상했고 실제 집필은 거의 내 친구가 했다고 얘기해주었다. 후배는 그제서야 그럴 줄 알았다고 오빠는 이런 시나리오 쓸 사람이 아니라며 이제 그만 퇴근한다고 로그아웃해버렸다.


친구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고 팔아버리고 나니 조금 찝찝했다.


이제 강해져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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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저물기 시작하는 남들 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늦은 오후. 나는 재택근무 중이다.

출퇴근 시절에는 당연히 매일처럼 봐왔던 내 옆자리의 둘째 언니와 맏언니, 맞은편의 새침떼기와 러시아 모델, 그 뒤쪽의 윤진서와 이쁜이 그리고 유학파 꽃미남, 제시카 알바, 근육질 꽃미남, 피부미녀 들을 더 이상은 매일 볼 수 없다.


이제 좀 친해진다 싶었는데 비슷한 나이끼리 반말 한번 편히 못 해보고 헤어지게 되다니 있을때 좀 더 잘 해줄걸 그랬다. 출근할때 <안녕하세요?> 먼저 퇴근할때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점심 때 <잘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등의 그냥 하는 인사도 더 이상은 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점심을 어느 식당에서 먹을지에 대한 고민도 이제 안녕이다.


비록 돈이 없어 사무실에서 음식을 시켜먹었던 조촐한 작년 송년회 때만 해도 음식들은 식어서 맛이 없었지만 내년엔 모든 일이 다 잘될거라고 서로 용기를 북돋워주고 희망에 가득 차서 헤어졌던 기억이 나는데 그날 이후 결국 1년을 못 넘겼다. 그날 누군가 다른 영화사 얘기를 하며 회사가 망하는데 보통 1년이 걸린다는 말을 했었는데 우리 회사 얘기가 되버렸다.


망년회를 할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한다 해도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 전원이 다 모이는건 회사가 살아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해보이고 다 모이자고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해도 막상 당일이 되면 각자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아마도 모두를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지금 분위기로 봐선 다시 모여도 분위기가 썩 좋을 것 같진 않다.


경험상 영화를 한편 같이 했던 스텝과 다른 영화팀에서 다시 만나기도 쉽지는 않은데 우리 회사 직원들과 다른 회사에서 직원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은 더더욱 힘들 것 같다.


매일처럼 해오던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전화 받기, 잡상인 정중하게 내쫓기, 손님 커피 접대하기, 당번 정해 청소하기, 밥먹고 시시껄렁한 농담하기, 다음주 개봉 영화 흥행 순위 내기하기, 야근 안해도 되는데 저녁먹고 사무실에서 시간 죽이기, 사무실 근처로 놀러온 친구와 커피빈에서 잡담하기> 등의 소모성 잡일들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됐다.


다만 내 청소 당번일이 몇일 남지 않았는데 나 대신 누가 청소를 하게 될지 조금 궁금하긴 하다. 월급이 밀리고 퇴직금은 언감생심이고 회사가 망하게 생긴 마당에 청소 당번이 궁금한건 왜일까.


영화사에 다니면서 영화를 한편도 못 만든건 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하지만 <둘째언니의 뜬금없지만 호탕한 웃음소리, 맏언니의 살신성인 하이컨셉 개그, 새침떼기의 귀여운 불평불만, 러시아 모델의 우아한 워킹, 윤진서의 느린말투, 이쁜이와의 사내 메신저, 유학파 꽃미남과의 커피 한잔, 제시카 알바의 미모 구경, 근육질 꽃미남의 향수 냄새, 피부 미녀의 낭랑한 목소리> 들이 이제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됐다니 기분이 좀 그렇고 왠지 싱숭생숭하다.


물론 메신저로 로그인해서 말을 걸면 대답이야 하겠지만 이제 우리들은 더 이상 고개만 들면 볼 수 있고 심심할때면 사다리타서 떡볶이를 나눠먹는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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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중독 심작가가 망해가는 영화사에서 짤렸다구 자살하지 말라며 위로 차원에서 밥을 사주었다. 물론 지금은 출근만 포기한 상태고 자살할 생각은 전혀 없고 내가 지금 위로 받아야 되는 상황이라는 생각도 한 적은 없지만 남이 볼땐 내가 지금 자살하네 마네 할 정도로 동정을 받아야 되는 상황인가 싶어 조금 씁쓸했다.


예전보다 얼굴이 훨씬 좋아진 심작가는 몇 년 간 영화일 하면서 번 돈보다 요 몇일 도박으로 번 돈이 더 많다면서 요즘 슬슬 정부의 도박산업에 대한 단속이 풀리는 중인데 다시 작년 수준으로 풀리면 도박묵시룩 카이지처럼 프로겜블러 생활에 도전하겠다고 야심차게 포부를 밝혔다.


얼마나 찌질거렸으면 영화일 몇 년해서 번돈보다 도박 몇 일해서 번돈이 더 많은지 모르겠다고 껄껄웃는 심작가는 나에게 회사 짤리고 정 할 일 없으면 자기랑 같이 프로겜블러나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그쪽 산업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혀 없어서 곤란하다고 했는데 태어날 때부터 프로겜블러는 없다고 자기 따라다니면서 한번 배워보지 않겠냐는 것이다.


내가 도박해서 밥벌이나 할 수 있겠냐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심작가는 영화해서 밥벌이 할 수 있는 확률과 도박해서 밥벌이 할 수 있는 확률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는데 듣고 보니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주식은 손실이 나면 본전 찾을 때까지 본의 아니게 장기투자라도 할 수 있지만 영화는 부가판권시장도 없어진 마당에 극장에서 간판 내리면 끝이기 때문에 생각해보니 도박과 별반 다를게 없는 것 같다.


심작가는 자기는 빚도 많고 더 이상 무서울 것 없는 막장 인생이라며 밀린 월급을 받아주면 자기한테 얼마 떼주겠냐고 물어왔다. 이 사람이 뭔 짓을 할지 몰라 살짝 두려워서 어떻게 받아낼꺼냐고 물어보자 월급 줄 때까지 회사 앞에서 발가벗고 드러눕겠다는 것이다.


빨간 스프레이로 온 몸에 대표 이름을 새겨놓고 비열한 거리의 조인성처럼 고함지르고 나체로 떼굴 떼굴 굴러다니면 얼마 되지도 않는 돈 쪽팔려서라도 안 줄 리가 없다고 했다. 적어도 네이버 지식인에 밀린월급 받는 방법 물어보고 대표가 자진해서 월급 줄 때까지 기다려서 받아낼 확률보다는 자기가 생떼써서 받아낼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갑자기 심작가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알고 있던 사람 좋고 글 잘 쓰는 심작가가 아닌 것 같았다. 괜히 밥 한번 얻어먹었다가 나중에 수틀리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살짝 걱정도 됐고 이런 사람도 영화판에서 비리비리하게 찌질이 취급을 받는 마당에 내가 영화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건 아닌가 반성도 됐다.


나는 내가 알아서할테니 제발 잊어달라고 했고 심작가는 언제든 생각나면 연락하라고 했다. 소주 한잔을 곁들인 순대국밥 한그릇을 비우기가 무섭게 심작가는 다시 도박하러 갔고 나는 심작가를 도박장 앞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왔다.


간판도 없는 불법 지하 도박장으로 걸어내려가는 심작가의 뒷모습에서 쪽박의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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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포기했다.


출근을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는 통보까지 받은 마당에 꼬박 꼬박 출근해서 할 일도 없이 회사에서 주는 점심이나 먹고 만화책, 소설책 뒤적이고 미드나 일드를 교대로 감상하며 저녁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도 못할 짓인 것 같아 깔끔하게 포기해버렸다. 


마케팅팀에 미인이 많기로 소문난 영화사에서 작품을 준비 중인 아는 형은 능력있는 직원이 오래 버티는게 아니라 오래 버티는 직원이 능력있는 거라며 알아서 출근을 포기하는 건 밀린급여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다른 직원들은 다 가만 있는데 너 혼자 출근을 포기하는게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다고 조언했다. 나는 떠날 때를 아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답지 않겠냐고 반문했는데 알아서 회사에 안나타나주면 적어도 한 명은 고마워할거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대로 출근을 포기하고 얼마 뒤 다른 회사에 들어간다고 가정을 해봤다. 몇 년이 지나고 때는 20xx년. 장소는 대한민국 서울. 더 이상 어린 나이는 아니다. 나는 몇년간 작은 영화사에서 경리와 배급을 제외한 기획과 제작 업무를 대강 해봤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지만 그럭저럭 평온하게 보내던 일상이 스크린쿼터 대폭 축소와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적인 불황으로 인한 영화사의 도산으로 갑자기 깨져버린다. 당장 다음달 카드값을 낼 돈도 없다.


또 다시 윗사람에게 출근을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는 통보를 받고 회사 사장과는 소원해지고 직원들은 뿔뿔이 제 살길 찾아 흩어진다. 나는 내가 기획했던 작품에 엮인 사람들로부터 밀려드는 불평과 원망을 한 건씩 정리하고, 나를 믿고 따라온 후배들은 아는 회사에 소개해준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만 혼자 남는다.


도저히 이력서를 들고 돌아다닐 기운은 없고 취직할 자리도 마땅치 않다. 어떻게 해야 먹고살 수는 있을까 고민을 해보지만 답은 없다. 친분이 있던 작가들마저 영화사와의 끈이 떨어진 영화사 직원과는 상종하지 않는다. 몇 달 뒤 실업급여도 끊긴다. 회사를 다니며 들고 있던 아이템을 뒤적여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제법 재미있는 시나리오가 있다. 이 시나리오로 뭔가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 결심을 한다.


아직 메이저 배급사와 거래를 할 수는 없지만 잘만 만든다면 소규모 개봉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래 일단 영화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자. 감독은 평소 친분이 있던 아무개에게 부탁한다. 이렇게 망상에 빠져 영화사를 창업하고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완성하고 개봉을 시킨다.


문제는 죽음의 계곡이다.


벤처(venture) 기업으로 보면, 설립 이후 아는 사람들의 돈을 다 끌어대 기술개발도 하고 마케팅도 한다고 설쳐 봤지만 자본금이 잠식되고 매출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라고 한다는데 영화는 아무리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만들 수는 있고 홍보만 잘하면 언론에도 오르내릴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죽음의 계곡을 절대적으로 피할 수 있는 묘수는 생각나지 않는다. 단순히 좋은 아이템이라는 주관적이고 막연한 판단으로는 일은 추진되지 않는다.


이제 출근할 필요도 없으니 돌파구를 찾기 위해 요즘 유행이라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칩거에 들어간 후 일체의 외부출입을 자제한 채 장고를 거듭해봐야겠다.

Posted by 애드맨

친구가 영화사를 차렸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더 이상 남들에게 내세울 것 없이 무시당하면서 살기 싫다고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다는 XX영화사 ceo 아무개 라고 적힌 명함을 건네주었다. 디자인이 심플한게 보아하니 친구가 디자인한 것 같았는데 물어보기도 전에 자기가 직접 디자인한 명함이라고 이실직고했다. 얼마 전부터 자기가 직접 영화사를 차려야겠다며 영화사를 만드는 법에 대해 물어보길래 장난같기도 하고 귀찮아서 네이버에 물어보라고 했었는데 조금 당황스러웠다.


다른 업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던 친구가 왜 뒤늦게 영화사를 차렸는지는 묻지 않고 일단 창업을 축하하며 향후 사업계획을 여쭈어보니 좋은 시나리오 발굴해서 투자 유치에 성공한 다음 영화를 만들 계획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친구의 호언장담을 듣고 처음엔 속으로 비웃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그동안 영화 사업에 대해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고 있던게 아닌가 싶어 잠깐 반성을 했다. 신생이든 메이저 제작사든 하는 일이라곤 돈 될만한 시나리오를 발굴해서 투자를 받아 제작한 영화를 극장에 거는 것 뿐인데 내 친구라고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물론 영화계에 아무런 인맥도 경력도 없는 내 친구가 영화 사업을 못할 이유를 대라면 무수히 열거할 수 있지만 그래도 젊음의 패기와 열정으로 이 불황에 영화사를 차린 친구의 기를 꺽고 싶진 않았다.


행운을 빌어준 다음 잠시 할말을 잃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친구는 자기 회사로 오고 싶으면 오라고 스카웃 제의를 했다. 공동대표만은 안된다고 선을 그으며 이사든 부사장이든 원하는 직책으로 명함을 만들어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 친구와 한배를 탔을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 후 너네 회사에 직원은 있냐고 물어보니 아직은 시작 단계라 직원은 없지만 동업자는 있다고 했다. 사무실은 어디냐고 물어보니 가정집이라고 했다. 그럼 월급은 주냐고 물어보니 월급 못 주는 영화사가 어디 한 두군데냐고 당장 너도 월급 못받고 잘 다니고 있지 않냐며 영화는 돈이 아니라 꿈과 열정으로 하는 거라는 가르침을 줬다. 자기는 돈은 아직 없으니까 월급 같은 건 기대하지 말라면서 나중에 대박나면 섭섭하진 않게 해 주겠단다.


친구와 둘이서 우리끼리 명함 교환하며 하루 종일 온라인 게임을 하게 될 것 같아 명함을 너무 빨리 만든 것 같다고 솔직한 감상을 돌려 얘기하니 ceo라고 적힌 명함이니까 나이트 가서 여자들한테 뿌리면 뽀대 날거라며 껄껄 웃었다. 나도 같이 웃어주었다.


순간 내가 한국 영화계를 배경으로 한 저예산 블랙 코미디 영화의 주인공 친구가 된 느낌이 들었는데 어차피 인생이란게 뭔가를 뿌려야 결실을 기대할 수 있으니 열심히 나이트에서라도 명함을 뿌리다보면 언젠가는 영화를 만들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단 행운은 빌어주었지만 스카웃 제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Posted by 애드맨

나는 블로그로 내부고발을 하고 있는 걸까?


김용철 변호사의 기자회견을 보고 내부고발자에 흥미를 느껴 마이클 만 감독의 인사이더를 다운받아보았다. 다국적 거대 기업이자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악의 무리로 묘사되는 담배 회사에서 해고된 러셀 크로우가 우여곡절 끝에 내부고발을 결심하고 사회적으로 핍박받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나니 어째 남의 얘기 같지가 않아 등골이 오싹했다.


사실 얼마 전에 먼 친척 아니 먼 친구 중 하나가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의 어쩌구하는 블로그가 웃긴다고 나에게 제보한 적이 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스타 블로거도 아닌데 이렇게 블로그와 나의 운명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물론 그 친구는 아직도 내가 이 블로그의 운영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아니다. 어쩌면 알고도 모르는 척 하고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무서운 일이다.


블로그를 이용해 내부고발을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없긴 하지만 나도 모르게 망해가는 영화사의 정체가 알만한 사람들에게 공개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심장이 쿵쾅거린다.


나는 밀린 급여 몇백만원 받겠다고 몇달에 걸쳐 치밀하게 블로그를 운영해오다 결정적인 순간에 펑하고 터뜨릴 계획을 짤 정도로 주도면밀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미 자의든 타의든 블로그에 오는 평균 천여명의 방문객들이 망해가는 영화사의 밀린 급여에 대해 알고 있는 마당에 어느 날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영화사와 등장인물들의 실명이 공개된다면 내부고발자 취급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잘못하다간 블로그가 영화인 신문고 역할까지 할 수도 있겠다.


만약 내가 다른 영화사 대표라면 망해가는 영화사 직원으로 일하며 회사가 망해가는 이야기를 익명으로 블로그에 끄적이다 들통나서 짤린 직원을 부하 직원으로 쓰고 싶지 않을 것 같고 다른 직원이 나도 모르게 우리 회사 이야기를 블로그에 끄적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같지는 않다.


아니다. 만약 다른 직원이 나도 모르게 우리 회사 이야기를 블로그에 끄적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무척 흥미진진해하고 즐기면서 구경할 것 같다. 그동안 몰랐었는데 정말 재미있는 친구라는 걸 알게 됐다고 생각하며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고 친하게 지낼 것 같다.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망해가는 영화사의 제2, 제3의 애드맨이 망해가는 영화사의 히스토리를 개인 블로그에 조용히 적어내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직원들 대부분은 싸이월드만 하거나 블로그는 안하는 걸로 알고 있지만 다른 직원들도 내가 블로그를 운영하는 건 모르고 있을테니 피차 마찬가지다. 심심한데 한번 찾아봐야겠다.


김용철 변호사는 다국적 거대 기업 삼성의 법무팀장으로 일하며 백억 먼저 챙기고 내부고발을 결심했지만 나는 일반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영화인 중에서도 유명하지 않은 중소 영화사 기획팀 직원으로 일하며 따로 챙겨둔 것도 없고 내부고발을 결심한다 해도 체불임금은 흔한 일이니 딱히 폭로할만한 껀수도 아니다.


아무개 영화사에서 급여를 안줘요 하고 폭로한다해도 사회적인 명분이나 개인적인 이익은 찌끄래기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블로그에 영화사 이름이 폭로되는게 내부고발인가? 고민을 차분히 블로그에 적어놓고 보니 어째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


역시 블로그는 담배만큼이나 정신 건강에 이롭다.

Posted by 애드맨

핸드폰에 정체불명의 전화번호가 찍힐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요즘이다.


작가 지망생 친구는 02-5xx로 시작하는 전화번호가 핸드폰에 뜰 때마다 혹시 영화사에서 온 전화가 아닐까 싶어 가슴이 두근거린다는데 나 역시 요즘은 작가도 아닌 주제에 처음 보는 번호가 뜨거나 부재중전화가 와있으면 은근히 설레인다.


설레임에 두근거리며 부재중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엄하게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자기 핸드폰은 돈 아깝다고 놔두고 사무실 전화로 나랑 친한 아무개 전화 번호를 물어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부재중전화는 전화 통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말그대로 한번 울리고 끊어지는 원링스팸이다.


휴대전화에 부재 중 전화번호가 기록되는 기능을 악용한 한번 울리고 끊긴 전화번호에 나에게 도움이 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전화를 걸어보면 십중팔구는 대출관련 안내멘트가 들려온다. 갈수록 세상살이가 팍팍해지는 요즘 껀수에 목마른 사람들의 혹시나 하는 심리를 미끼로 사람을 낚아올리는 원링스팸은 나랑 친한 아무개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의 전화만큼이나 반갑지 않다.


전화벨을 한번만 울리고 끊는 얄미운 짓을 대출회사에서 하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언젠가부터 내 주변사람들 중 몇몇도 원링스팸을 보고 배웠는지 통화료가 아깝다는 이유로 한번만 울리고 끊어버리는 얌체짓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친구들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면 벨이 여러번 울릴 동안 내가 못 들었거나 진동으로 해놔서 그랬으려니 생각했는데 의심스럽게도 정해진 몇몇 사람들의 전화만 나도 모르게 못 받는 일이 잦아지자 이 놈들이 나에게 원링스팸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번은 실제로 한번만 울리고 끊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하는 짓이 얄밉길래 바로 전화해서 너 지금 나한테 원링스팸하냐고 물어보자 처음엔 아니라고 잡아떼더니 계속 추궁하자 요즘 돈도 없고 사는게 힘들어서 그랬다고 선처를 부탁했다. 그 이후로는 지인들의 원링스팸을 당할 때마다 다들 사는게 힘들어서 그러려니 생각하고 나도 절대로 먼저 전화는 걸지 않는 방식으로 대처를 해왔는데 얼마 전부터는 나도 원링스팸을 시작했다.


잠이 안 오거나 수다를 떨고 싶은 밤에 내 돈 내면서 통화하기 싫을 때 만만한 지인들을 상대로 원링스팸을 돌린다. 내가 원링스팸으로 낚시질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친구는 절대 전화는 하지 않고 <그 나이 처먹고 할 짓 없냐>며 네이트온 무료 문자를 보내는데 아직 내가 원링스팸을 즐기고 있다는 걸 아직 모르는 친구는 무슨 일 있냐며 전화를 해주기도 한다. 무슨 일은 없지만 아직 원링스팸에 낚였다는 자각이 없는 친구와 이런 저런 안부를 나누고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고나면 즐겁고 흐믓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다.


참고로 카이스트에서 산업디자인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오기태(33)씨가 운영하는 ‘부재중전화 스팸번호 & 선불폰 검색 DB(http://missed-call.no-ip.info) '에서는 원링스팸번호를 조회할 수 있는 시스템을 직접 개발, 무료로 사용자들에게 제공하고 있으니 부재중전화번호를 보고 <과연 누구시길래 나에게 전화를 주셨을까> 궁금해하며 가슴 설레이는 사람은 낚이기 전에 한번 이용해보는 것도 좋겠다.

Posted by 애드맨

잘난 것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든 회사에 붙어있으라는 조언을 들었다.


몇 년 째 외롭게 홀로 방구석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친구가 해준 말이다. 월급이 나오든 말든 비전이 있든 없든 어떻게든 회사라는 조직에 속해있지 않으면 일이 잘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몇 년째 해 봐서 아는데 괜히 혼자 뭔가 해보겠다고 치기부리지 말고 그냥 나죽었다 생각하고 회사에 남아 있으란다. 자기도 고만고만한 프리랜서 영화인들끼리 모여 세미나도 하고 공동작업도 하고 이런 저런 시도를 많이 해봤지만 몇 년째 이 모양 이꼴이지 않냐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프리랜서 시절 얼마나 회사라는 조직에 배고파했는지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아무리 큰 조직에 속해있더라도 영화는 결국 개인이 만드는 거라는 의견도 있지만 당장 프리가 되면 회사에 다닐 때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무실이 없어지고 점심도 스스로 알아서 차려 먹어야 한다. 매일 매일 만나는게 당연한 동료들을 만나는 것도 일이 되고 쉽게 만나지지도 않는다. 당장 만나면 밥값 커피값은 누가 내야되는지도 애매해진다. 프리 상태에서 일거리가 없는 나날이 지속되면 점점 주머니가 가벼워지고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고 그러다보면 일할 기운은 나지 않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적어도 회사를 다니면 이런 고민은 안해도 된다. 그런데 회사를 오래 다니다보면 이런 장점들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고 어느 순간 망각해버린다.


친구는 자기 시나리오로 영화사에서 미팅 한번 해보는게 소원이라며 기획팀의 한계 어쩌구하며 자학하는 나에게 배부른 고민 좀 그만하라고 했다. 소주잔을 비우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절대 니 발로 나오지 말라구. 회사가 망해서 강제로 건물에서 쫓겨나기 전까진 어떻게든 붙어있으라고. 진짜 험한꼴 보기 전엔 나오면 안된다구.


그나마 내가 회사에 있고 작품을 개발하는 업무를 맡고 있으니까 이런 저런 사람들도 만나고 전화도 하루에 열통 이상 받을 수 있지 만약 회사 관두고 집에 혼자 있으면 열통 오던 전화 한통도 안 오고 자기랑 도서관에서 놀아야 된다며 안타까워했다. 친구는 나를 도서관에서 보게 되면 위로와 격려의 라면 정도는 한번 사줄 용의는 있지만 왠만하면 오지 말라고 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영화사에서 출퇴근하며 영화를 하다가 도서관이나 잠을 자고 일어난 방에서 혼자 영화를 하게 되면 답은 없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개인적으로 하게 될지도 모르는 프로젝트를 주섬주섬 얘기해주니 어느 영화사에서 하는 거냐고 묻고는 영화사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자 이거 선수끼리 왜 그러냐고 백수는 백명이 모여도 백수라고 비웃었다.


친구는 술에 취했는지 괜히 혼자서도 잘할 수 있는 척 치기 부리지 말라는 말만 반복하다 나를 이날 이때까지 회사에 다닐 수 있게 해준 대표님에게 감사하며 건배를 했다. 친구는 전철 끊기기전에 집에 가야된다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카운터로 갔다.


친구의 조언은 고마웠지만 술값은 아까웠다.

Posted by 애드맨

영화 인생 초창기 시절 윗사람에게 쇼비지니스 업계인 영화판에서 살아남으려면 옷을 잘 입고 다녀야 한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 분은 언제나 남들 옷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고 관심도 많으셨는데 회사에 출근하면 제일 처음 하는 일이 사람들의 의상 품평이었다.


개성있고 독특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직원은 무척이나 이뻐했고 무식하고 구리게 입고 다니는 직원은 준엄하게 구박했기 때문에 회사 내에선 옷 잘입는 사람의 말빨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열배는 강력했다. 그러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어느 정도는 맞춰 입고 다니려고 노력하는 분위기였는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그분의 취향과는 전혀 맞지 않는 쪽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기성세대와 제도권에 대한 저항정신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내가 뭘 입고 다니든 니가 무슨 상관이냐 노선이어서 그분이 뭔 소리를 하든 쌩까고 살았지만 몇 달 못가 아침마다 들려오는 잔소리에 질려버려 결국엔 그분의 취향에 나를 끼워 맞춰버렸다.


체제에 순응하니 몸은 편했지만 속으로는 남의 옷에 신경쓸 정력으로 영화나 잘 만드시라는 생각 뿐이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영화는 개봉 후 쪽박도 그냥 쪽박이 아니라 DOG쪽박을 차버렸다.


그 분과 결별한 이후로 영화일을 제대로 하려면 옷을 잘 입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그와는 반대로 영화일을 잘하고 있으면서도 옷에 대해 아무런 개념이 없는 사람들을 골고루 만나왔는데 개인적인 연구결과에 의하면 옷을 잘 입든 못 입든 명품을 입든 짝퉁을 입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옷차림과 그 영화의 흥행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우리 대표는 영화일을 하려면 옷을 제대로 입어야된다고 생각하는 중에서도 하이클래스 멋쟁이 명품족이다. 처음엔 <어머나. 이를 어쩌나.> 지출해야 될 옷값을 생각하니 어깨가 무거웠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는 직원들의 복장에 대해 말씀을 많이 하셨다는데 다행히 초반에만 잠깐 그러다 직원들의 무반응에 포기하셨단다. 고마웠다.


그러나 대표가 아무 말을 안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윗사람의 취향에 맞춰주는게 예의라고 생각해 최소한의 품위는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옷을 맞춰 입고 다녔는데 이번에는 회사 구성원들의 옷차림과 회사의 운명은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됐다.


최근에 들은 소문으로는 한 글자 제목 액션 영화를 만들고 투자사에 엄청난 손해를 입힌 재일교포 감독도 영화를 하려면 옷부터 잘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본인 역시 제법 스타일리시하게 입고 다녔다고 한다.


이쯤되면 옷차림과 영화일의 상관관계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데 아직 결론은 내리지 못했지만 적어도 나에게 2007년 겨울 새옷은 필요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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